조중균 씨는 아무것도 적지 않아도 되는 시험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얻는 점수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여름이 가까운 교정에서 다당다당다당 하는 꽹과리 소리가 들려왔다. 조중균 씨 귀에는 왠지 그것이 나 가 나 가 나 가 하는 소리로 들렸다. (…)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 씨는 부끄러웠다. 여기에 이름을 적고 가만히 기다리라는 교수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조중균 씨는 이름을 쓰지 않고 빈 종이에다 무언가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30쪽)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중에서
고요한 풍경을 찢고 가르고 튀어나온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떻게 일상을 뒤바꿔놓는지, 무너지는 어느 오후의 길 위에서 무엇을 놓치고 잃어버렸는지, 순식간에 몸집을 불린 감정들이 어떤 자국과 얼룩을 남기고 지나갔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런 것들이 내 예상과 짐작에서 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고 그런 순간엔 뭔가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내가 다큐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었는데 내가 끌어안고 있는 어떤 시간들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확실히 그 잠깐 동안은 모든 게 괜찮아졌다. (54쪽)
---「김혜진, 〈와와의 문〉 」중에서
나는 재이와 나를 여기에 보낸 허 교수의 저의를 다소 의심한다. 더불어 오래전 글을 쓰면서 꿨던 꿈을 생각한다. 명품 카탈로그만큼이나 화려하고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패션지를 보는 여자들을 비웃으며 그녀들이 아무리 명품을 욕망한들 소용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래전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쓸 때의 이야기다. 이제 남은 과제는 세상의 모든 글쓰기를 감당하는 일이다. 내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이 있다면 그 역시 글쓰기라는 행위다. (89~90쪽)
---「박민정, 〈아름답고 착하게〉 」중에서
어쩌면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 지나가버린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일지도. 이번 여행이 끝나면 우리 또한 완벽한 타인이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어느 한 점 교차한 적 없는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그렇게 서로에게서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다. (119쪽)
---「백수린, 〈길 위의 친구들〉 」중에서
나는 벽에 적힌 낙서들을 보았다. 낙서들의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마당에 나와 머리 빗는 여자들과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결국 바람결, 숨결, 물결. 글쎄라는 그물에 걸리지 않는 극과 극. 안녕과 안녕의 간극. 흰 벽에서 흰 벽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검은 문장들만 남은 것 같았다. 여기는 어디일까. 나는 순식간에 내가 살았던 모든 시간을 동시에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들은 단번에 수많은 이미지들로 되돌아왔다. 내 피부는 희고 부드러웠다. 내 피부는 뜨거운 빛에 검게 그을렸고, 빈틈없이 쭈글쭈글했다. 나는 그저 어떤 한 골목을 통과하고 있었는데. (165쪽)
---「윤해서, 〈커서 블링크〉 」중에서
그는 25년을 살았고, 나는 25년을 다 살고 난 다음부터의 시간에 대해 자주 생각해왔다. 내가 최근 2년간 가장 많이 한 생각이 바로 그 시간에 관해서였다. 그가 살지 않은 시간을 내가 사는 것이 나는 이상하게 생각되었고 이 세상에 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할 내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 생각은 내가 한 것이지만 마치 누군가 대신한 다음 내게 주사한 것과 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을 함께했고 그것은 이미 10년도 더 된 일이라 거의 모든 기억이 흐릿했다. 나는 2년 전부터 시간을 들여 그 봄의 기억들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생각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정작 연필을 들고 무언가를 쓰는 데 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노트의 메모를 보면 그와 내가 얼마나 달랐는지 알 수 있다. 나는 그를 조금 싫어했던 것 같다. (176쪽)
---「이주란, 〈몇 개의 선〉 」중에서
그렇게 너는 특별한 아이였다. 키나 몸집은 또래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풍기는 분위기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은 확연히 달랐다.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아이답게 너에 관한 소문 역시 끊이지 않았다. 교문 앞에 멈춰 선 고급 승용차에서 네가 내리는 걸 목격한 아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때문에 네가 유명 여배우의 딸이고 곧 너 역시 아역 배우로 데뷔할 거라는 말이 돌았다. 네가 H제과의 손녀라는 말도 있었는데, 당시 학교 근처에 H제과 회장이 살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였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말들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부터가 가짜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너를 둘러싼 소문들이 너를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202~203쪽)
---「조수경, 〈유리〉 」중에서
감자를 포대에 담아주며 승재 어머니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감자 썩는 건 순식간이니까 보관을 잘해. 하나가 썩으면 그 옆 감자가 썩고, 또 그 옆의 감자가 따라 썩는 식으로, 그렇게 한 포대의 감자가 모조리 썩어 들어가는 게 한순간이라니까. 그러니 썩은 놈을 발견하면 얼른 골라내야 한다는 말이었지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처음은 겨우 단 한 알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전체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게 된다는 거지요. 장난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단 한 알의 썩은 감자처럼 순식간에 퍼지고 말아, 나는 선생님에게 그런 말들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246?247쪽)
---「최정화, 〈지극히 내성적인 살인의 경우〉 」중에서
제목에 Earth가 들어가는 책 따위 원래 없었다. 없는 것을 있다고 믿고 그 거짓말에 나부터 속아야 했다. 그리고 모두를 속여야 했다. 글은 그렇게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속고 있음을 영영 잊어서는 안 되겠지. 지금은 없다. 그렇다고 영영 없으리란 법은 없다. 언젠가는 그 책 위에 냄비를 올려두고 라면을 먹을 것이다. 베고 잘 것이다. 그 책을 다른 책의 독서대로 삼을 것이다. 책장을 넘기며 읽을 것이다. 그러려면 우선 그를 만나야 한다. 만나기 위해 건물과 차와 사람 속에 뒤섞여야 한다. 무서워도 사랑해야 한다. 그러다 다시 방을 뛰쳐나와 이른 아침 버스에 홀로 몸을 싣게 되더라도. (285쪽)
---「최진영, 〈0〉 」중에서
갑자기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기도 전에 차가 크게 뒤흔들렸다. 죽은 할아버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충격이 덮쳤다. 나는 뒷좌석 아래로 고꾸라졌다. 차는 끊임없이 앞뒤로 흔들렸다. 남자는 우리를 아예 박살내려는 작정인 게 분명했다. 눈을 꾹 감고 버텼다. 눈을 감아야만 간신히 비명이나마 지를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몸을 납작하게 업드린 채로 빌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뿐이었다. 누구에게 빌어야 하는지는 몰랐다. 적어도 아버지는 아니었다. 잘못했어요.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이었다. 그러니 일단 빌고 보는 것이다. 침을 뱉는 기분으로. 다신 안 그럴게요. (316쪽p)
---「황현진, 〈내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운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