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과학은 서구의 백인 중산층 남성에게 권력을 부여하는 불평등한 관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그 관계를 재생산하고 있다. 표면에 드러난 남성 과학기술 엘레트의 모습 뒤에는 여성들의 보이지 않는 지원 네트워크가 있다. 여성들은 기구를 조립하고, 사무실과 실험실을 청소하고(이는 종종 그 자체로 위험성을 내포하는 작업이다), 과학계의 최첨단에서의 [남성과학자의] 생활을 편하게 해 주는 물질적 정서적 지원을 제공한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는 하고 있지 않지만, 어디에선가 시작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선언문과 함께 우리가 첫걸음을 내딛었다는 것이 회의 참가자들의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이 자유롭게 서로서로와 그리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지구 위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행동이 취해지기를 희망한다.

서구의 다국적 기업들은 너무 위험해서 자국 내의 보건과 안전을 위한 보호 규정을 충족시킬 수 없는 화학 공정들을 수출하면서 그러한 이중 노동력 구조 모델까지 함께 수출해왔다. 그들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듣는 동남아시아 정부들은 이들 다국적 기업에게 자기 나라를 착취할 가장 매혹적인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열심히 경쟁을 벌여왔다. 말레이시아 페낭에 위치한 자유무역지대 (Free trade zone, FTZ) 에서는 그 지역의 실업자가 아닌, 주로 시골 출신의 말레이 여성들을 고용한다. 이 여성들이 지녔던 문화적 전통들은 여기서 공장의 엄격한 규율을 강제하는 귄위주의적 인물에 복종하게 만드는 과정에 교묘하게 이용된다. 이러한 복종은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법적으로 제한함으로써 더욱 강화된다. 노동자들의 건강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어떤 유효한 요구조건도 없는 상황에서, 많은 노동자들은 몇년이 지나면 고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건강상태가 악회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결국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명분 하에 제3세계 정부들은 다국적기업들과 협력하여 자국의 인적 자원을 탕진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과학은 선인가? 악인가?<br/><br/><br/> 우리의 생활 속에서 어느 순간, 과학기술의 산물이 모두 사라져버린다면, 아니 존재하더라도 작동을 멈춘다면, 우리는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물론 그런 일이 일어날려야 일어날 수 없겠지만, 어느덧 과학기술의 이기(利器)에 철저히 길들여진 우리는 단 며칠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현대를 사는 우리의 삶 속에 깊숙이 강고한 뿌리를 박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 발전의 영향력은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과학기술이 결국 인간을 노예로 삼고 있다면, 더구나 강자의 논리로 약자를 끊임없이 수탈하고, 인간에게 혜택을 준 것 이상으로 유해하고 위험한 요소로 기능한다면, 특히 제3세계에서. 이를 어떻게 진단하고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인가?<br/><br/> 예컨대 과학기술의 발전이 갖가지 문명의 이기들을 손가락 끝에 날라준다고 선전되곤 하는 오늘날, 10억이 넘는 세계 인구가 최소한의 생계조차 유지하지 못해 영양실조로 허덕이는 생활을 하루하루 해나가고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이는 결코 현대적 과학기술의 전파가 '뒤늦어서' 빚어진 사태가 아니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기아와 빈곤을 퇴치하겠다며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을 통해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근대적 개발 과정은, 애초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배 엘리트 및 이와 유착한 다국적기업의 배만 불리고 사회적 불평등을 키웠으며 환경을 악화시키고 전통적 지식과 생활 방식의 체계를 파괴해 왔다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 있다. 즉 제3세계의 입장에서 서구의 현대 과학기술은 단지 애초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유해하고 위험한 어떤 것이었던 셈이다. <br/><br/><옮긴이의 말 중에서><br/><br/> 현대 과학기술이 제3세계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전통문화를 파괴했으며 제3세계 국가들의 환경을 황폐화시켰다는 이 책의 주장은 지나친 것일까? <br/> 이 책은 1986년 11월 제3세계 네트워크와 페낭 소비자 연맹이 '현대 과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미국, 일본, 홍콩을 비롯하여 태국, 인도, 스리랑카, 아르헨티나 등지에서 과학자, 대학교수, 기자, 풀뿌리(민주주의) 활동가들 140여 명을 불러 개최한 국제회의의 선언문을 1988년에 발행한 것이다. 당시 국제회의의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현대 과학기술이 제3세계의 개발을 위한 도구로 아무런 의심 없이 이용되는 한편으로 제3세계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을 점검해 보자는 것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현대 과학기술의 이용과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정치·종교·문화를 가진 제3세계 국가들의 전체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작동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현대 과학기술이 개발을 위한 중립적·객관적·보편적 도구라고 생각한 제3세계에서 오히려 무수히 많은 폐해와 문제들이 나타났음을 통렬하게 고발했던 것이다. 회의 참석자들은 현대 서구과학의 인식론적 측면과 그 응용이 가져온 사회적 결과 ― 환경파괴, 불평등, 대외의존 심화 등 ― 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하여 인종주의, 성차별, 군국화, 에너지, 보건, 농업, 원격통신 등의 측면에서 서구 과학기술(의 도입)에 내재한 문제점들을 분석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과 행동 전략을 제시했다.<br/> <br/> 이 책이 발간되고 13년이 흐른 지금 시점에서 보면 일부 자료와 사실이 시의성이 떨어지고 일부 대안에 공소(空疎)함이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globalization)의 물결 속에서 전지구적 남북격차가 심화되고, 부시의 등장으로 미국이 자국의 과학기술력을 바탕으로 MD체제를 구상, 힘의 논리가 고개를 더욱 꼿꼿하게 쳐들고 있는 한편, 전지구적 삼림자원 및 자연자원 고갈문제가 대두되고 제3세계의 환경 악화가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고, 초대형 과학기술 사고가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과 생명공학의 각광과 함께 선진국의 다국적기업들이 제3세계의 생물자원을 약탈하는 소위 '생물해적질(biopiracy)'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 책의 논지는 오히려 현재의 시점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할 것이다. <br/> 또한 이 책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서구 과학기술의 파괴적 본성, 비인간적인 모습, 약탈적 성격, 낭비성 등에 주목하면서 비판만 가한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일관되게 제3세계 고유의 기반 창출을 제안하고 있음에 있다고 하겠다.<br/><br/>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파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또 산업화된 국가와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통제되고 방향이 정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할 때, 제3세계 국가들로서는 과학기술 지식의 생성, 이용 및 확산을 위한 그들 나름의 고유한 기반을 창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3세계 국가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울이는데 있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기술 이전과 서구 과학의 수입이라는 관념 전체가 이제 비판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기조 선언 중에서><br/><br/> 끝으로 미국의 대표적 GMO 생산 다국적 기업의 하나인 몬산토에 대항하고 있는 인도의 농민운동 사례를 실어 다국적 기업의 파렴치한 행태와 제3세계의 저항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