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나기
어린시절 누구나 그려봄직한 아름다운 풍경이 있을 것이다. 예쁜 소녀와 순진한 소년이 함께 있는 짧지만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청포도 같은 순수함과 깊진 않으나 곰곰이 생각할수록 여운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추억의 한 장면. 황순원의 <소나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잊지 못할 첫사랑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잘 알려진 국민 소설로, 영화·TV등 많은 장르를 통해 제작· 패러디된 작품이다. 잘 알려진 만큼 대중성이 있으나 워낙 잘 쓰여진 단편이다보니 제작상의 어려움도 있다. 밋밋한 캐릭터를 보완하고 극적 사건을 강화시키다 보면 자칫 문학적 향기가 날아갈 위험이 존재한다. 현대적 감각의 재해석은 또 하나의 어설픈 패러디를 생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는 큰 장점이 있다. 어린시절 소년 소녀들의 사랑을 소재로 한다는 점, 이들의 사랑은 어른들의 성숙한 사랑과는 달리 풋풋하면서도 순수한, 따뜻한 가슴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란 점에서 사랑을 쉽게 여기는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해져 가는 현대인들에게 느낌을 줄 수 있는 좋은 작품이 될 것이다.
2. 내가 살았던 집
여자'는 정규방송이 종료했음을 알리는 TV화면을 바라보다가 리모콘 스위치를 눌러 꺼버리고, 방으로 가서 미리 챙겨두었던 여행 가방을 다시 한번 꼼꼼히 체크한다.
욕실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울 앞에 서서 물기를 닦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들려온다. 여자는 멈칫하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 쪽을 바라본다. 받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그녀의 표정 위로 벨소리는 멈춘다.
그녀의 짧은 한숨. 곧이어 다시 울리는 전화벨 소리. 마치 누군가의 작은 외침처럼, 벨소리는 저쪽 방에서 복도를 지나 허공을 타고 날아와 그녀를 감싸고, 그녀는 좀체 움직임이 없는 석고상처럼 거울을 향한 채 서있다.
비행기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서려던 그녀는 욕실에서 자신을 부르는 딸의 소리를 듣는다. 딸은 세면대 앞에 선 채 자신의 팬티를 망연자실 바라보고 있다. 마음이 급한 그녀는 자신의 서랍에서 생리대 팩을 꺼내 딸에게 건네주며 위로의 말을 던진다. 그녀를 태우고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는 얼마 못가서 극심한 교통체증에 묶여버린다.
거북이 걸음으로 흘러가던 택시 안에서 그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지고 찢겨진 자동차의 파편들을 본다.
출장에서 돌아온 여자는 거울을 보다가 문득 자신이 걸고있던 목걸이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고, 생리가 끝난 딸아이는 햄스터가 자기 새끼들을 잡아먹었다고 분해하며 햄스터 철망 집을 베란다로 쫓아버린 상태였다. 어미 햄스터의 독특한 생태에 대해 설명하려던 그녀의 의도는 오히려 딸의 분노를 사게되고, 속이 상한 여자는 햄스터를 들고 나가 애완동물 집에 돌려주며 애꿎은 주인에게 화풀이를 한다. 미혼모로 딸애를 데리고 살아온 시간들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녀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 힘든 시간들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역시 홀몸이 된 그녀의 엄마까지 가세하여 그녀의 삶을 쉽게 놔두지 않는 듯했다. 여자, 여자의 엄마, 여자의 딸 - 이렇게 삼대에 걸친 여자들의 갈등은 미묘하게도 딸애의 첫 생리를 기점으로 더 증폭되어간다.
여자는 방송국에 있는 친구의 전화를 통해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2년 전 남자는 그녀를 떠나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다.
방송국 뉴스 기자였던 그는 여자보다 연하였고, 이상하리만치 쾌활하고 감성적이며 의욕이 넘쳤다. 문득 여자는 그와 노래방에 갔을 때 즉석에서 전화로 생중계 보도를 하던 그의 엉뚱한 모습을 떠올렸다. 남쪽부터 눈이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듣고는 함께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 첫눈을 맞이하고 다시 폭설이 내린다는 강원도를 향해 달려갔던 헤프닝도 있었다.
결혼 소식을 친구를 통해 들은 후 얼마 지나 남자는 여자에게 전화로 자신이 결혼했다는 말을 전했다.
“동등한 조건을 원했었잖아?” 하는 말과 함께…
3. 역마
열 살의 성기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절에 온다. 그 위로 흐르는 무당 할미의 말.. 대대로 내려오는 역마살을 잠재우기 위해 아이를 절에 가두어두라는...
성기는 연못에 돌을 던지며 천진하게 노는데 혜공스님에게 성기를 부탁하는 할머니 명례. 명례가 옥화주막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딸 옥화와 이야기를 나눈다. 옥화는 절에 가둬둠으로 아이의 역마살을 잠재울 수 있을까 불안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명례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딸을 안심시킨다. 명례와 옥화는 같은 운명을 지녔다. 그들은 역마살의 피해자다. 명례는 36년 전, 주막에 머물다 간 남사당의 진양조에 반해 하룻밤 연분을 맺어 옥화를 낳았고, 옥화 역시 같은 주막에서 떠돌이 시주승을 만나 인연을 맺었다. 물론 그 중은 이후로 다신 볼 수 없었고 성기가 태어났다. 옥화는 늘 떠남과 머무름에 대해 생각을 한다. 주막에 오는 이들 중엔 옥화를 마음에 두었거나, 혹은 그냥 한번 찔러보는 놈팽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옥화는 모두에게 한결같은 낯으로 대할 뿐 이미 감정을 잃어버린 사람같다. 가끔 시주승이 오면 눈여겨 보는 것 같지만 기다리는 그 사람은 아니다. 옥화도 떠나고 싶다. 그러나 그를 만나기 위해 늘 그곳에 머무른다. 성기는 절에서의 생활이 싫다. 그러나 옥화에게 돌아가는 것도 싫다. 아주 어린 애기적부터 옥화는 성기가 조금만 밖에서 오래 놀다 돌아와도 호되게 야단을 치곤했다. 옥화로부터 50보만 떨어져있어도 옥화는 난리였다. “에미 옆에 딱 붙어있어야 되능겨!”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그 소리가 막연히 혼자된 엄마의 모든 것이 자신임을 눈치채게 만들어, 오히려 성기를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게 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엄마 옆에 있어주자, 그리고 나중에 아버지를 찾아 강원도라도 가보자고... 마음을 다스리며 불경 대신 이야기책을 보며 밤을 밝히는 성기.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옥화는 성기에게 책전을 열게 해주었다. 화개장터가 열릴 때마다 성기는 책전을 편다. 그것은 옥화가 성기의 역마살을 다스리게 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또한 옥화는 성기를 눌러앉힐 방편으로 주막에 길순이라는 처녀를 들였다. 귀애하는 색시가 생긴다면 또는 자식이라도 낳아 기른다면 성기는 떠나지 않으리라. 하지만 성기는 길순에게 관심이 없다. 와중에 명례가 죽는다. 명례는 죽기 전 옥화에게, 이제 10년이니 성기의 역마살도 거진 때웠을 것이라며 한 많은 삶을 마친다. 명례의 무덤 앞에서 옥화는 반드시 성기만은 잡고 말겠다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이제 옥화에게 남은 건 정말로 성기 한 사람 뿐이니....
4. 외등
1998년 눈이 퍼붓던 겨울 어느 밤, 한국 재계 2위인 대성그룹의 젊은 회장 노상규가 사옥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기도한다. 같은 시각 강원도 외진 곳에서 한 사내가 뒷산 참나무에 기대 동사한 채 발견된다. 신문사 기자인 서재희는, 대성그룹 노상규 회장의 자살 기도을 낙종한 탓에 데스크 오부장의 질책을 받다가, 오빠 서영우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된다. 재희는 오빠 서영우가 동사했다는 소식에 강원도로 향하지만, 이미 시신은 장기 이식을 위해 병원으로 옮겨진 후였다. 오빠 서영우가 이미 생전에 각막을 누군가에 기증하기로 했으며, 그 수혜자가 민혜주란 사실을 접한 재희는 경악한다. 민혜주는 대성그룹 노상규의 아내이며, 오빠 서영우의 인생을 질곡으로 몰아놓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차디찬 서영우의 주검 앞에서 재희는 민혜주와 서영우의 질긴 그 인연의 시작을 떠올린다.
1983년 봄. 당시 고교 3년생이던 서영우는 동급생 노상규의 강권에 끌려 종로 3가 뒷골목 어디쯤의 방석집에 가게 된다. 생전 처음 여자를 안을 기회를 갖게 되지만, 영우는 어느 후미진 방안에서 기모노 차림의 한 소녀와 막닥뜨리게 되고, 얼떨결에 도망쳐 나오고 만다. 그 날 밤, 영우는 집에 돌아오던 길에 군인들의 차량을 보게 되고 불길한 느낌을 갖는다. 투옥 중이던 영우의 아버지가 폭압적 정권에 의해 갑작스런 사형집행을 당하고 그 시신이 집에 도착한 것. 아버지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영우에겐 지울 수 없는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그 무렵 영우는 민혜주와 다시 재회한다. 종군위안부 출신의 어머니를 둔 민혜주. 일본에서 막 건너와 전학을 온 그녀. 영우는 이 수수께기 같은 민혜주에게 강한 운명을 예감케 된다. 그런 둘 사이에 끼어든 노상규. 고교 이사장의 아들이며 황태자처럼 군림하던 상규. 그 역시 혜주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혜주는 상규의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독선적인 노상규에게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상규는 영우가 혜주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우를 강압, 연애편지를 대필시킨다. 수업시간 중에 혜주는 그 편지를 선생에게 들키고 만다. 게다가 엄마가 종군위안부라는 급우들의 희롱에 당황하는 혜주를 위해 영우가 대신 나서 주먹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혜주와 영우는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들의 달콤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해 정신을 피폐한 혜주의 친모 서산댁은 남자에 대한 병적인 혐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혜주와 영우의 풋사랑에 그녀는 분노한다. 결국 서산댁은 혜주를 데리고 황급히 영우의 집을 떠나게 되고 그것이 혜주와 영우의 이별이 된다.
1990년대 초반.
영우는 반 정부 시위진압을 하는 경찰이 된다. 아버지로 인해 새겨진 빨갱이의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는 경찰의 길을 택한 것. 하지만 연행해 조사하던 학생이 취조 도중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자, 영우는 고문수사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쓰고 구속된다. 막 신문사 신입 기자가 된 재희는 대성그룹 후계자로 성장한 노상규에게 영우의 석방을 부탁하게 되고, 당시 정권 실세 였던 노상규의 백부의 힘을 얻어 영우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출소하게 된다. 그러나 서영우는 노상규와 재회한 자리에서, 노상규의 옆에 서 있는 민혜주를 발견하고, 그녀는 이미 상규의 약혼자가 돼있음을 알게된다. 세월이 흘렀고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지만, 영우는 여전히 혜주를 사랑하고 있다. 영우는 자신의 교복단추를 사랑의 증표로 간직한 채 이별했던 혜주를 떠올린다. 실망스럽게 발길을 돌린 영우 앞에 느닷없이 달려온 혜주. 그녀는 몸은 상규 옆에 있지만 마음은 여전히 영우에게 있음을 알리려는 듯, 여전히 영우의 교복단추를 간직 한 것을 보며 혜주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다시 만난 그들은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고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혜주는 영우로 인한 혼란스러움에 답을 찾는 여행이었지만 영우는 ‘혜주를 행복하게 해줄 사람은 노상규’라는 말로 둘 사이를 단정 짓는다. 실망한 혜주는 그녀를 찾으러 내려온 노상규의 차에 동승하게 된다. 한편 영우는 혼수상태에 빠졌던 학생이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숨지자 다시 쫓기는 처지가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