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친구로 다정한 사이였던 그 아이 경혜(가명가 나에게 엄청난 일을 안겨주고 일본으로 떠나갔다. 차용증서 몇 장 남겨주고…
그때 울면서 찾아간 곳이 칠보사였다. 스님께서 전생의 빚이라 생각하고 관음기도 많이 하라고… 관음기도 많이 하면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하셨다.
그래서 정해놓고 “관세음보살님! 잘못했습니다!” 외치고 울고 하면서 백일기도를 마치고 그 끝이 풀리지 않으면 또 백일을 잡고 그런 식으로 계속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조금씩 편해지는 나 자신을 보면서 부처님 말씀에 젖어들기 시작했다.---p.16
나에게 예외 없는 고통과 어려움에 봉착하는 시련이 있었고, 서울 생활은 또 세금과 남과의 견제가 있는 관계로 어려움이 촉발됨을 알고 스스로 체험했고 검소한 마음에서 복이 온다 했으니, 그간 사치한 마음으로 생기는 분노, 남과 비교하는 부러움, 질투, 허영의 마음은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른에 대한 공경심 갖기, 나와 다름 인정하기, 부드럽고 다정한 말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기 등을 정해놓고 천막법당이라 여기면서 10년 기도 원력을 세웠다.---p.19
늘 고민했던 종교관! 나의 수행생활에서 느낀 것은 나와 다름을 인정하자는 것이었다. 자비심, 너그러움, 배려 등 통합하여 나와 다름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렇게 하다 보니 원한 가질 필요도, 미움도 원망도 질투도 시기도 욕심도 보잘 것이 없다.
사랑하고 좋아했던 관계도 넘치지 말고 치우치지 말고 그냥 지켜보고 그냥 지나가니까. 놓아두면 그냥 지나감을 알았다.---p.37
엄마는 몇 달간 금강경을 수시로 읽으시고 감탄도 하시고 이것이 부처님이 해놓은 것이냐고 묻기도 하셨다. 난 기도 점검이든 공부 점검이든 어른 스님 찾아뵙고 법문을 들어야 했던 나의 그릇보다 엄마가 독송한 후 던진 말씀들이 “어머! 어떻게 알았어? 엄마”, 하시면 “한문에 의미가 있으니 알지” 그러시면서, “수보리제자 우리 위해 질문이 많구나!” 하셨다.
엄마는 부처님 법을 처음 접하고 계셨는데… 어느 분에게도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텐데… 이것이 근기인가? 함께 밥 먹으면서 난 “감사, 감사합니다!” 외치곤 했었다.---p.42
엄마는 누워 계시면서도 도반들이 오면 지난 날 살아오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남편한테 잘해라!” 방긋 웃으면서 “얼마나 수고 많으셨어요.” 반갑게 맞이하라고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다정하게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은 알아듣고 잘한다고 하셨다. 해가 기울어지면 “어서들 가시게! 늦게 다니면 안 된다”고… “특히 여자는 해 있는 시간에 볼일 보고 해지면 집에서 맛있는 음식 해놓고 여자는 꽃으로 보여야 한다”고 하셨다.
그러면 도반들은 “감사합니다. 예~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 대화와 웃음 그리고 노래로 이어졌다.---p.61
〈아미타경소〉로 극락왕생 법보시 인연도 맺었다. 양산 정토원 원장이신 정목 스님이 쓰신 경책인데 엄마의 인연덕으로 스님과 전화 통화로 인연 되어 원효 스님의 〈아미타경소〉를 일게 되었고, 그 인연으로 아미타불 염불을 하게 되었다. 그간 좌선하면서 화두 잡고 있던 나에게 아미타불 염불선이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대상을 아미타불의 화신(化身으로 보도록 연습하였다. 그렇게 해서인지 시비(是非가 쉬어진다. 그리고 무심하게 하루하루 지내게 된다. 밖에 관심이 끊어지고 궁금하지도 않으니….---p.79
늘 발심을 내어본다. 팔정도(八正道 근본 삼아 신심 키우고 서원력 다지겠다고….
스스로 계를 정해보면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바른 행동하기/ 두려움 없이 보살행(종교인의 본 실천/ 차별 없는 삶/ 대비심으로 일체를 평등하게 보기/ 언행에 빚지지 말 것/ 빠짐없이 교화하는 마음/ 지혜롭고 현명하게/ 유정·무정 모두에게 회향/ 불필요한 것을 하지 말기/ 검소함, 외부의 만남 절제/ 쓸데없이 외출 삼가/ 지금 바로 여기서 ‘나’란 상(相 없애기…).---p.96
자유롭게 살았던 나는 자유를 반납했다. 만행(萬行이라는 명분으로 자유롭게 하던 산행과 산사 속의 생활을 모두 접어야만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된다고 했던가. 난 효녀로, 자식으로, 엄마를 모시기보다는 아는 만큼 실천행을 하는 수행하는 딸로서 엄마와 함께 했던 것이다.
어느 때는 본분을 망각하며 엄마에게 짜증내고 있음을 알아채기도 했다. 부담과 번거로움을 느낄 때마다 다시 본분(本分을 챙기며 엄마와 수행중이라는 마음으로 일주일 3번 목욕을 하고, 매 때 식사와 빨래 청소와 말동무 해드리기는 쉽지 않았다. 했던 말 또 여러 번 듣고 나면 허기가 졌다. 혼자 지낼 때보다 일이 많아져서 육신이 너무 힘들었다.
‘엄마 한 분 모시는 데도 이런 감정이 일어나는구나’ 하면서… 한가롭게 책도 읽고, 뒷산 산책하고 도반들과 나누던 여유로운 차 한 잔도 나에게는 어려움으로 남겨졌다.---p.113
엄마는 병석에서도 정신력으로 염불을 놓지 않으셨다.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중간 중간 물으시길,
“수보리는 누구니? 부처님이 나 같은 사람 예뻐하실까? 남 속이거나 도둑질, 모함, 자식 때리지 않고 살아오긴 했는데, 다 늙고 저승 갈 때에 부처님을 찾았어도 예뻐하실까?”
어느 날은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님 액자를 보시고는,
“저 아줌마가 옆에 와 앉아 계신다”고 하고, “저 아줌마가(관세음보살사진 아이들(남순동자들인듯을 데리고 왔다. 아이들이 금옷을 입고 왔네.”
하시고 혼미한 상태에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입으로 염불하시고 누워 계신 엄마! 엄마는 대단하신 정신력이셨다. 나와 함께 지내는 기간 동안 엄마는 혈압약, 치매억제약 등은 모두 끊어버렸다.---p.123
엄마는 결국 부처님 점안식 날짜와 같은 날 밤(음 10월 10일 밤 10시 임종하셨다.
마지막 눈 감기 전까지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힘겹게 하셨다. 그리고 아미타불 정근 들으시면서, 조용히 예쁘게 바른 자세로 입술 꼬옥 다문 채, 두 손 배꼽 위에 가지런히 하셨다.
남동생은 “잘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직하게 귀에 들려주고, 난 “소풍 잘 가세요”, “감사했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렸다.
1시간 뒤에 경희대 병원에 연락하여 엄마를 보내드렸다. 엄마는 자식들 생각해서 하루를 집에서 그냥 보내시었다.
“고맙습니다, 엄마!”
손녀딸이 호주 유학 마치고 귀국한 날, 모두 함께 자리를 지켰다. 엄마는 증손녀까지 보고 가신 것이다. 금, 토, 일 3일장이라 학생들까지 축복하듯 모두 모여 가시는 길을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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