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세계의 모핑(morphing)이나 밝은 색깔과 조명 효과를 사용하는 하이퍼그래픽 기법은 현재 가상현실이 보여주는 극정성의 일부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잠시 덧붙이자면, 데카르트 철학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오토마타에 대한 우려가 현대에 와서 변하고 있다. 예전의 데카르트 철학은 우리가 인간을 꼭 닮은 정교한 로봇에게 속아 넘어갈 것인가 아닐 것인가를 걱정했다. 새로운 걱정은 하이퍼리얼리티가 ‘리얼리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에 관한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다. 영화 〈론머맨〉에서 론머맨은 여자친구와 가상현실 성교를 하는데, 그 둘이 환상적으로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이 모핑 처리되어 마치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처럼 ‘오르가슴’의 절정을 그리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경우 관객에게는 2차적 관점에서 본 이미지-몸이 투사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장면이 낭만적인 음악, 흔들리는 카메라, 몸의 일부분을 은근히 보여주는 식의 다른 영화 기법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 차이는 단지 하나의 비인간 변형 모습일 뿐으로, 그런 테크놀로지가 만들어 낸 암시적 표현이 하이퍼섹스를 달라보이게 만든다. 가상현실은 극장성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는 후발 주자지만 이미지를 만드는 테크놀로지에서는 가장 앞서 있다.--- p.54
도나 해러웨이는 자신을 일컬어 “숨 쉴 때마다 다윈과 푸코를 호흡하는” 사람이라 했다. 이 표현을 흉내 내자면 나는 메를로퐁티와 푸코를 호흡한다. 앞서 언급한 몸1과 몸2라는 쌍생아 개념의 핵심적인 의미는 이 두 학자에게서 빚진 것이다. 몸1은 여기-위치한 몸의 경험 즉 실존적으로 살아 있는 몸으로, 이러한 몸을 일컬어 후설은 몸이라 했지만 이를 훨씬 더 잘 묘사해 발전시킨 것은 메를로퐁티의 ‘체현된 몸’이다. 몸1은 우리가 우리 둘레의 세계를 경험하는 데서 나타나는 지각하고 행동하고 지향성을 갖는 존재하는 몸being-a-body이다.
(중략)
몸2는 맥락 바깥에서 문화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구성된 몸을 일컫는다. 이것이 바로 푸코가 비난한 몸으로,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사회적 의미들이 쓰여 있거나 의미화되는 몸이며 표지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몸은 특정한 나이와 특정한 문화, 특정한 계급의 여성일 수도 있고, 따라서 우리의 특정한 존재가 체현되거나 길러진 문화적 관점을 지닌다. 여기서 도나 해러웨이 식의 상황적 지식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표지가 남아 있는 문화적 몸, 즉 몸2가 되려면 표지를 할 수 있는 몸1이 있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겠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은 이 두 가지 몸에 대한 담론에서 생겨나는 근대 인식론의 이중 해체다. 첫 번째 해체는 반反데카르트주의에서 생겨나는데 현상학에서 발전된 지식의 체현이다. (중략) 두 번째 해체는 비록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어도 어쨌든 페미니즘에서 가장 빨리 번져 나갔다. (중략) 몸의 담론은 해체와 재구성 두 측면에서 모두 상황적 지식에 기여했다. 해체된 것은 초기 근대의 탈체현되고 비시각적이며 신과 같은 인식론이다. 재구성된 것은 위치성과 지각을 지니고 체현되었으며 육성된 지식, 즉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 있거나 세계와 관련된 실천으로서 지식의 의미다.--- pp. 135-137
만일 비인간의 필요성이 늘 틀리지 않았다면, 아직 논란의 여지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현대 과학학의 치료를 통해서야 비인간이 비로소 확실한 가시성의 영역으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중도 입장을 취한 내 의견은 이렇다. 사실상 비인간의 행위소가 되는 특정 감각이 있으며, 최소한 비인간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인간과 상황이 변형되고 번역되는 방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에 완전히 동의해 달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분명한 대칭성의 상황이 일부 존재하기는 하지만 대개 제한적일 뿐이며, 많은 상황은 여전히 비대칭인 채 남아 있다는 점이다. 그런 상호작용에서 대상들(비인간)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주체는 비중립적이고 순진무구하지 않다는 점에서 한결같지만, 변형이 일어난다 해도 항상 즉각적이거나 실시간으로 변형되는 것은 아니다. 안경, 타자기, 컴퓨터 시스템은 변화하고 ‘향상’되며, 이들 속에는 여러 시대에 따라 다양한 방식의 저항과 화해가 뒤섞여 있다. 기껏해야 대칭성의 수준이나 종류가 달라지는 정도인 것이다.
더는 비인간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나 내 생각에 비인간이 사회화될 수 있는 수준이란 아직까지는 불분명하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아직 과학학에서조차 과소평가하고 있지만, 비인간의 특성은 어떠한 의도 없이도 비의도적이고 비계획적인 결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데 있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비인간과 ‘춤을 춘다’면, 그때의 스텝은 종종 음악과 다르거나 음악에서 벗어날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이야말로 해러웨이가 사용한 사이보그라는 은유가 그렇듯 힘을 가지는지 말해 주는 이유 중의 하나다. 잡종에는 목적이란 없다.
p. 221) 마지막으로, 나는 그저 쉬운 결론을 내리고 싶지는 않다. 모든 기술 환경의 문제는 더 많은 테크놀로지를 응용하기만 하면 해결할 수 있다거나, 테크놀로지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마주한 문제들을 풀지 못한다는 식의 쉬운 결론 말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모든 기술 환경적인 문제는 복잡하고 애매하고 서로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쉬운 과제가 아니지만, 유토피아적인 태도나 디스토피아적인 태도는 양쪽 모두 궁극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재의 상황이 보여주는 애매하고 복잡한 상황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자리를 잡아야 할 곳이고, 기술 환경적인 문제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 또한 여기임이 분명하다. 21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이보다 더 나은 자리가 과연 어디란 말인가?--- p. 182
과학철학, 과학학, 기술철학, 그 각각과 몸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마다 나는 체현의 역할과 그 지각적인 표현을 전면에 내세우려 노력했다. 그러나 체현은 언제나 인간과 관련 테크놀로지 사이의 관계라는 의미에서 상대적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몸이다. 그러나 매우 기본적인 이 개념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이 놀라우리만치 적응력이 강하며 다형적이라는 점 또한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바로 우리가 테크놀로지와 맺는 관계 그 안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몸이다.
--- pp. 238-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