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슈나는 순간에 산다. 그는 순간순간에 산다. 사실 희열을 지닌 모든 사람들은 순간 안에 산다. 희열의 사람은 현재, 이 순간, 살아 있는 이 순간을 제외한 다른 어떤 시간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없다. 그에게 순간이란 영원 그 자체이다. 그는 한 순간에서 다른 순간으로 여행한다. 그에게 과거와 미래는 둘 다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이 순간에 전적으로 책임을 다한다. 살아 있는 순간에 열리는 것이 그의 삶의 방식, 그의 즐거움, 그의 희열이다.
고통과 비참함을 구하는 자, 자기 학대자는 현재, 이 순간에 완전히 눈멀어 있다. 그는 누에고치처럼 그 자신 속에 갇혀 있다. 그는 존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그를 장미 덩굴로 데려가서 “이보게! 이 만발해 있는 꽃들을 보게,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그에게 말한다면, 그는 다음과 말할 것이다. “저녁이면 시들어 버릴 이 아름다움이 무슨 값어치가 있는가?” 그에게 젊음의 광휘에 대하여 말해 보라. 그러면 그의 반응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곧 세월이 흘러 늙을 것이고 나중에는 무덤으로 갈 것이다.” 행복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그것은 신기루와 환영과 다르지 않다. 그것을 쫓아가면 갈수록, 그것은 더 멀리 달아난다. 나는 그것에 속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마음은 항상 시간에, 미래에 고정되어 있다. 그는 결코 현재의 순간에 살지 못한다.
다른 한편, 희열을 지닌 사람은 현재의 순간에 전적으로 살고 있다. 그는 그의 과거를 끝내 버린다. 그래서 그는 미래도 또한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심리적으로 볼 때 과거에 대한 투사에 불과하다.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 오면, 희열에 가득 찬 사람은 색깔들의 다채로움에 빠질 것이다. 그는 꽃들의 춤에 맞추어 춤추고 노래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비관론자에게 말할 것이다. “왜 내가 아직 오지 않고 있는 저녁에 대해 걱정해야 하는가? 시들어 가고 있는 이 꽃들조차도 그것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지 않은가? 그것들을 보라. 얼마나 멋지지 않는가!”
저녁이 올 때, 희열의 사람은 아침에 꽃들의 만발함을 즐긴 것과 같은 열정으로 꽃들이 시들어 가는 것을 즐긴다. 만발한 꽃들만이 매혹적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시들어 가는 꽃들은 보기에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들어 가는 꽃들은 아침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슬픔에 잠긴 눈은 그 아름다움을 보지 못한다.
누가 오직 일출만이 아름답다고 하는가? 일몰은 아름다움에서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누가 오직 어린이들만이 아름답고, 늙은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가? 늙은 나이는 그것만의 아름다움, 그것만의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이 그것 자체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젊음과 노년은 매혹에서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어떤 분명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누군가의 머리가 백발로 변할 때, 누군가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끝내려고 할 때, 누군가가 풀리고 이완될 때, 당신이 일몰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관론자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나는 크리슈나가 순간을 산다고 반복하여 말한다. 희열의 여정은 순간으로의 여정이다. 그것을 여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로 잘못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순간 속을 여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직 그것 속에 빠질 수 있다. 당신은 시간 내에서는 여행할 수 있다. 그러나 순간 속에서는 깊이 더욱 깊이 가라앉을 수만 있다. 순간의 길은 수직적이다. 그것은 수평적이지 않다. 순간은 오직 깊이만을 가지고 있으며, 길이가 전혀 없다. 반면에 시간은 오직 길이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깊이도 없다. 그러므로 순간 안으로 가라앉은 사람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는 시간 너머로 간다. 시간 없음에 이르는 사람은 영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크리슈나는 순간과 영원 내에 있다. 순간은 영원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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