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노력의 결과가 나타나듯,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이름 앞뒤에 한 쌍처럼 ‘수영’이 따라 붙기 시작했다. ‘수영 코치 이현진’, ‘수영 유튜버 이현진’, 단순하게는 ‘이현진 수영’과 같은 식이다. 수영 유튜브로 PR을 열심히 했기 때문일까. 왠지 나를 보는 사람들에게서 처음부터 돌고래처럼 거침없이 수영을 했을 것이라는 기대 아닌 기대가 느껴질 때가 있다. 그래서인지 꽤 자주 “처음부터 수영을 그렇게 잘했어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수영으로 알려지긴 했지만 첫 수영의 기억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아홉 살 꼬마가 아빠의 목에 매달려 처음 들어간 수영장은, 놀이의 개념이 아니라 죽고 사는 생존의 문제라도 되듯 위협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마음속 깊이 숨어들어, 순간순간 곤혹스럽게 했다.
--- 「물, 가장 나답게 만드는 공간이지만」 중에서
돌이켜 보면, 인생은 아이러니하다. 인생을 통틀어 본다면 그 공포가 결국 용기가 되어 주었다. 설령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이 발목을 잡는 순간이 오더라도 그것에 지지 않을 수 있다는 용기, 그리고 끝내 절실히 원하는 것은 이룰 수 있다는 용기 말이다. 그 시절 “너무 무서워, 그만할래.”라며 포기했다면 두려움을 넘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니까.
우리 안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있다. 스스로가 겁쟁이처럼 느껴지는 순간도 올지 모른다. 너무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분명 올 거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고 용기를 낸다면, 두려움은 우리를 더 넓은 세상으로 이어 주는 튼튼한 다리가 되어 줄 것이다.
--- 「두려움 vs 용기」 중에서
그렇게 수영을 그만두게 되었다. 아홉 살에 시작해 몇 년을 바쳐 온 수영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사람은 계속해 오던 걸 안 하게 되면 어딘가 이상해진다는 것을. 평소 3시부터 6시까지 운동을 했다고 치면, 더 이상 수영이든 운동이든 하지 않아도 되는 걸 알면서도 그 시간만 되면 마음이 불안하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TV에서 수영 시합이라도 중계할 때면 왠지 당장 그곳으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이런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 「애정과 애증 사이에서」 중에서
의지하지 않기, 힘 빼기, 균형 감각 갖기 등은 비단 수영에만 국한되는 법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 역시 너무 많은 각오들이 오히려 인생의 과호흡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찾아온 인생의 권태기나 수영의 권태기로 불리는 수태기나, 어찌 보면 이런 경직된 각오들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 순간순간을 즐기며 살자. 즐긴다는 건 뭔가 거창한 게 아니다. 인생은 절대 앙코르 타임을 가질 수 없으므로, 과호흡이 오지 않을 정도로만!
--- 「권태기나 수태기나」 중에서
가끔 스타트를 가르치다가 문득 강습생들을 보면, 장난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들이 배치기를 너무 열심히 해서 배가 다 빨개져 있는데, 그 모습이 꼭 노릇노릇 잘 구운 스팸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미안한데, 지금 여러분 배 스팸 같은 거 알아요?” 하면 다들 빵 터지면서 배를 문지른다.
--- 「다이빙과 배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