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이거 술집이야.” “지랄을 한다.” “진짜야. 술집 이름이야.” “닥치고.” “진짜야.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노래도 있어.” 엄마가 믿어줄 리 없지. 내가 딸을 도대체 어떻게 키운 것인가. 이따위로 만들려고 그동안 돈을 처들였던 것인가. 내 팔자는 왜 이런가. 그런 종류의 한탄이 이어졌다. 가만 듣자니 좀 말이 안 된다 싶었다. “엄마.” “왜.” “이게 호텔이라고 쳐. 그렇다 치자. 엄마는 내가 연애도 못하고 평생 처녀로 늙어 죽길 바라는 거야? 나는 아무 짓도 하지 말고 남자도 만나지 말고 가만히 처박혀 살아?” 엄마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렇겠지. 엄마가 생각해도 그건 아니겠지. 서른도 넘은 딸, 어쩌겠어. 결혼을 안 한다고 연애도 하지 말라면 그건 엄마가 나쁜 거지. 그렇지. 엄마도 수긍을 하는 거겠지. 엄마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어떤 거지새끼를 만나길래 지가 호텔비를 다 내고 다니나. 내가 울화통이 터져서 정말.” 아아. 그렇구나. 내가 그 생각까진 못했구나. 엄마가 이겼다. 하지만 거기, 호텔 캘리포니아는 진짜 술집이라고요. --- pp.15-16
“선생님, 이러다가 거문도 고등어를 우리가 다 잡아버리겠어요. 주민들한테 미안해서 어쩌죠?” “괜찮으니께 다 먹어조져라.” 가두리 위에서 회를 떴다. 잎새주 몇 병을 앞에 두고 고등어회를 날름날름 집어 먹었다. 돔도 낚고 전갱이도 낚았다. 이러다간 백 마리도 넘게 잡겠다며 기세등등해진 우리를 보며 선생님이 한마디 하셨다. “느그들은 참말로 뭐든 좋아해부는구나. 그러니께 내가 뭘 해줘도 참말로 생색이 난다.” 선생님, 우리는 쉬운 여자들이니까요. (……) 밤바다는 몹시 차가웠다. 발을 담갔다가 몇 번 퐁당거리지도 못하고 뛰어나오고 그래도 또 들이밀고 달아나고, 나는 혼자 신이 나서 깍깍 소리를 질렀다. 담배를 물고 멀찍이 앉은 선생님이 말씀하셨단다. “저것은 아직 살 만한갑다. 남편이랑 죽이네 살리네 하는 년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바다로 쭉쭉 밀고 들어가는데, 저리 떠들어부치는 걸 보니 쟈는 아직 괜찮다.” 나는 그러니까, 아직 살 만한 거다. --- pp.21-24
나처럼 시시하게 당선 소식을 들은 이가 또 있을까. 시시해도 가슴이 턱 막혔다. 뜨끈한 수증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가방을 열었지만 담배가 찾아지지 않았다. 아예 가방을 거꾸로 들고 탈탈 털었다. 담뱃갑을 손에 쥐고 사무실을 빠져나온 나는 거리를 잠깐 서성였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말을 걸었다. “Can I borrow your lighter?” 당선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한 말이 라이터를 빌려달란 소리였다니. 그렇게 회사 밖, 브리즈번의 가장 번화가인 퀸즈몰의 벤치에 앉아 호라이즌이라는 이름의 담배를 한 대 피웠다. 하도 헐거워 서너 모금 빨고 나면 꽁초만 남아버리는 싸구려 담배였다. 담배를 입에 물고 나는 질질 울었다. --- pp.99-100
“우리를 만나기 전에 얘들은 도대체 뭘 하면서 살았을까.” 누군가 대답했다. “심심했어.” 또 누군가 말했을까. “외로웠지.” 뜬금없는 이야기 같았지만 우리는 곰곰 생각해보았다. 심심하고 외로웠을까. 한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둘이거든. 처가 쪽 식구들이랑 가끔 만나 점심을 먹는데 보통 중국식당에 가. 아이들이 여럿이다 보니 사람 수대로 음식을 다 시키진 않잖아. 항상 두 그릇 정도 덜 시켜. 남길 테니까. 그러다 보면 요리가 나올 때마다 어른들에게 음식 덜어드리고 또 아이들 덜어주고. 난 자꾸 풀때기만 먹게 돼. 십 년쯤을 그런 것 같아. 나도 고기 먹고 싶은데. 그냥 그렇게 됐어.” 우리는 가만히 웃었다. 너도 나처럼 어른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싶었다. --- pp.104-105
“밤에 갑자기 전화를 걸어서, 우리 가락국수 먹자, 그러는 남자가 있었으면 좋겠어. 동네에는 포장마차가 있어야지. 둘이 나란히 앉아 국수를 먹는 거야. 그러면 절로 사랑이 될 것 같아.” (……) 내 바람도 K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소주 사줘.” 말할 수 있는 남자와 또 싸디싼 집 앞 포장마차를 동시에 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