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나 리옹에서 오래 산 주민과 여행객들에게 도시는 각각 다르게 다가온다. 그러나 정주하는 사람보다는 여행객에게 도시는 더 멋지다. 왜냐하면 도시가 인상파의 그림처럼 빛에 반사된 첫인상으로 어렴풋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의 파리에 대한 기록에 파리의 주민은 말한다. “아니, 파리에 6년을 산 나도 파리를 잘 모르겠는데, 며칠 파리에 있다고, 파리를 어떻게 알아요? 그냥 관광이나 하세요.” 리옹을 잘 아는 한 지인은 여행객으로서의 내가 리옹에 대해 알 자격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여행객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도 많다. 물론 여행객이 어찌 파리나 리옹의 세세함을 알겠는가. 그러나 도시의 분위기, 전체적 윤곽, 첫인상은 그 도시에 며칠을 묵어가는 여행객에게는 더 오래 남는다. 오래 그 지역에 뿌리박은 사람에게 그 지역은 생활의 공간이지, 첫인상의 공간은 아니다.
우리는 왜 인상파 그림에 열광하는가? 그들은 화가의 독점력을 거부하고 화가로부터 관람객에게로 권력을 이전했기 때문이다. 인상파의 그림은 관람객의 생각과 쉽게 섞인다. 인상파 그림을 찍으면서 그 사진에 내가 살짝 비춰 함께 찍혀진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건 인상파의 그림이 정보를 꽉 채워 빈틈없는 뜨거운 미디어가 아니라 여백과 개입이 자유로운 쿨한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도시도 그렇다. 여행객에게 도시는 더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첫인상으로 쉽게 규정되고 동시에 그 도시에 나를 투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객에게도 파리의 도시를, 리옹의 도시를 해석하고 채워가는 권리를 부여할 수 있고, 부여해야 한다.”
“지하철은 연인에게 임시 점유된 사적공간인가? 파리의 씨떼역에서 복잡한 지하철을 타려고 하는데 서로 껴안은 젊은 남녀가 나를 밀친다. 이쪽으로 타지 말라는 뜻이다. 다른 문으로 타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한다. 서로 껴안은 공간을 내가 직접 침입한 것도 아닌데 타려고 하니 나를 밀친다. 건장한 프랑스 젊은 남녀의 공력에 나는 쉽게 밀렸다. 한국의 옛날 푸시맨이 그리울 정도로 두 사람의 역푸쉬는 강했다. 바깥으로 밀려나는 역푸쉬는 여기서 처음 당한 듯하다. 생을 통틀어 복잡한 지하철을 타본 횟수가 족히 5000번은 되었을 터인데 그 중 5000분의 1의 확률로 물리적 법칙이 뒤바뀐, 바로 그 역푸쉬가 파리에서 벌어졌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해본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어땠을까. 관계란 신뢰에 기반을 둔 유대이며, 신뢰는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며, 그 작업에는 자아 개방의 과정이 포함된다. 상호 자아 개방을 하는 최상의 것은 이성 관계다. 낭만적 사랑의 사회 풍조가 형성된 것은 로렌스 스톤도 지칭했듯이, 정서적 개인주의이며, 이는 개방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낭만적 사랑의 이상은 인생이 낭만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현대는 낭만적 사랑이 살아 있는가. 그런 것 같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아직까지 그렇다. 지하철에서 나는 그 커플로부터 거세게 튕겨 나갔지만, 그건 아마도 자신들 둘만의 개방성을 위해 내가 배타적으로 희생된 것이리라.”
“리옹역은 파리에 있고, 리옹에는 리옹역이 없다. 파리에 리옹역이 있다는 것은 파리의 기차역에 도착하는 순간, 리옹에 있는 것과 같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TGV가 파리를 떠난다. 그리고 괴력의 속도로 2시간이면 리옹에 도착한다. 우리는 파리의 리옹역에서 괴력의 속도를 탑승 전 미리 체감한다. 이미 리옹에 와 있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파리에 역을 두고 리옹역이라 명명한 이유를 알 듯하다. 당신은 이곳에서 기다림과 권태를 느낄 틈도 없이 유체를 이탈하고 잠깐 눈 감고 일어나면 그곳 또한 리옹이다. 파리는 이미 가상의 메트릭스 세계가 또 다른 현실 세계임을 알았던 듯하다.”
“사실 성형문제도 그렇다. 한국에서 성형이 유행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외모중심주의에 두지만, 표정에 대한 한국인의 관념도 한몫을 한다. 한국인은 표정을 중시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를 사회적 예절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상사 앞에서 싫다고 하기보단 일단은 긍정하고 싫지 않은 표정을 보여야 한다. 기회를 봐서 다시 얘기해야 하는 것이 예법으로 통한다. 감정에 솔직한 표정을 담는 것은 불이익을 각오하고 하는 일이다. 이러니 성형과 양악수술로 로봇 같은 부자연스런 표정이어도 크게 문제될게 없다. 다양한 표정을 원하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성형은 그런 문화적 배경을 깔고 있다. 단순히 외모의 문제만이 아니라 의사소통에서의 표정문제도 성형중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나는 표정이 다양한 사회였으면 한다. 그래서 외모미인이 아니라 표정미인이란 새로운 개념쳀 생겼으면 좋겠다. 프랑스에서 보고 느낀 그런 표정의 다양함과 솔직함이 부럽다. 그로 인해 언성은 좀 높아지고 작은 갈등들은 둘레둘레 보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오해가 줄어들고, 갈등의 골도 깊어지지 않으며, 그래서 평등도 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