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하다 보면 단풍나무 무늬의 캐나다 국기를 배낭에 달거나 옷에 새긴 캐나다인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처음엔 유독 캐나다인들만 국기에 대한 애착이 강한가 했다. 미국 바로 옆에 있으면서 별 개성 없어 보이던 캐나다, 여행 전에도 여행 후에도 난 태나다라는 나라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캐나다는 거의 미국과 같은 나라라고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유스호스텔에서 마침 캐나다인 제임스를 만났다. 역시나 자기 나라 국기를 배낭에 척 하니 달고 있다.
“왜 캐나다 사람들은 국기를 항상 지니고 다녀요?”
제임스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혹시라도 사람들이 날 미국 사람으로 착각할까 봐요.”
아니, 그렇게 깊은 뜻이? 캐나다인들이 그런 생각으로 국기를 달고 다니는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참에 좀더 그동안 캐나다에 대해 궁금했던 걸 물어볼까?
“솔직히 저도 캐나다랑 미국이랑 거의 비슷한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외모도 비슷하고 영화 박스 오피스 순위도 똑같고……. 안 그래요?”
“하지만 우린 미국인과 전혀 틀려요. 그건 마치 한국과 일본이 비슷한 나라라고 하는 것과 같아요.”
맞는 말이다.
캐나다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자기 옆 나라와의 경쟁 관계, 마치 우리가 일본에 느끼는 묘한 감정 같은……. 미국과 캐나다, 영국과 프랑스, 호주와 뉴질랜드, 다들 친구면서도 경쟁자이다. 이들 나라 사이에선 알게 모르게 늘 묘한 기류가 흐른다. 오세아니아에 와보니 호주에서 뉴질랜드 사람들을 두고 농담으로 만들어 씹고 또 뉴질랜드에선 호주 사람들을 두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제임스와 한참 미국과 캐나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얘기를 하는데 유스호스텔의 게릭이 커다란 와인병을 들고와 잔을 건넨다. 게릭은 벨기에에서 온 여행자로 직업이 특수경찰이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터프하고 썰렁했ㄷ. 우리는 화제를 바꿔 뉴질랜드 이야기를 했다.
“뉴질랜드에도 전통적인 요리라는 게 있나요?”
“대체적으로 서양의 메뉴가 다 비슷해요. 파스타, 스테이크, 햄버거…… 그런 것들을 주로 먹죠.”
영국에서 온 이주민들이 세운 나라라 그런지 몰라도 뉴질랜드는 참 영국식인 것이 많다. 사실 난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뉴질랜드적인 것이 보고 싶었다. 유스호스텔의 친구들과 뉴질랜드적인 것이 과연 뭘까 대화를 나눴다.
“뉴질랜드 럭비 본 적 있니?”
게릭이 내게 물었다.
“그게 뭐야?”
스포츠에 문외한인 내게 사람들이 경악을 한다.
“럭비는 뉴질랜드를 대표하는 인기 스포츠야. 그 경기를 한번 보고 나면 뉴질랜드적인 것이 뭔지 알 수 있을거야.”
게릭의 말에 제임스도 수긍을 한다. 그런가?
럭비는 뉴질랜드의 국민 스포츠라고 한다. 그리고 보니 이곳 뉴질랜드에 와서 럭비팀 올블랙의 로고가 새겨진 많은 종류의 상품을 백화점이나 조그만 상점에서 흔하게 봤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땐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는데 그 안에 정말 뉴질랜드적인 것에 대한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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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시간 동안 먼지 풀풀 나는 버스를 타고 이리 저리 흔들리며 쿠스코에 도착했다. 중간중간 화장실 때문에 무척이나 고생을 했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고생한 기억은 싹 달아나고 드디어 쿠스코에 왔다는 기쁨만이 앞선다. 내리자마자 조금만 걸어도 금방 숨이 차온르다. 시장을 둘러보니 잎사귀 같은 것이 많이 팔리고 있었는데 그건 코카잎이었다. 한 다발 사서 내내 질근질근 씹고 다녔는데, 과연 효과가 있는지 고산 증세가 많이 가라앉는 느낌이다. 시장에는 인디오들이 나와서 많은 것을 내다 팔고 있었는데 우리 나라 재래 시장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감자, 야채, 생필품들. 한 가지다른 점이 있다면 생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오늘 저녁거리로 쌀을 사고 계란만 한 줄 샀다. 에콰도르에서 떠날 때 이모님이 주신 멸치볶음과 김이 있으니까 마음까지 든든하다.
고산지대라 밥도 잘 되지 않아 한참을 물을 붓고 불을 조절해야 했다. 그런데 고생한 보람도 없이 쌀이 설익고 죽밥이 되어 버렸다. 내 옆에서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프랑스 아가씨 2명이 자기가 한 요리라며 자랑하기에 조금 얻어서 배를 채웠다. 솔직히 별 맛은 없었지만 그래도 맛있다는 표정을 지어줘야 했다. 멸치와 김이 있으니 밥만 있으면 간만에 한국식으로 푸짐하게 먹겠다 했는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압력이 높아 밥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을 몰라 멋진 저녁 식사가 수포로 돌아갔다.
저녁에 시장을 돌아나니다 현지인들이 북적대고 있는 허름한 술집을 발견했다. 어디든 현지인들이 북적대는 식당이며 술집이 제일 값싸고 맛있는 곳이다. 막걸리처럼 보이는 분홍색과 노란색의 전통술을 팔고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맛있다고 적극 권해줘서 한 입 맛을 보았다. 평소 술을 좋아하므로 세계를 여행하며 그 나라의 술은 기회가 되면 다 마셔보는데 이런 막걸리 같은 맛은 처음이다. 이 막걸리 같은 술은 옥수수로 빚은 '치차'라는 술로 페루의 대표적인 술이라고 한다. 무너져 가는 치차 술집에 현지인드이 몰려들어 내가 술 마시는 걸 보더니 킥킥거리며 웃는다. 뭐가 그리 재미있을까?
“한 잔 더 주세요.”
그러자 자기들끼리 또 킥킥거리며 웃는다. 웃음이 헤픈 볼이 빨간 사람들. 정말 순박하다. 흰색과 분홍색의 2다지 술이 있는데 내가 흰색 술만 먹고 있으니 옆의 아저씨가 한 잔을 거하게 마시더니 분홍색 술을 잔뜩 담아 잔을 나한테 내민다. '잔 돌리는문화가 여기도 있나?' 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꼬맹이가 옷을 잡아 댕긴다. '마시라는 말이겠지? 에라, 나도 모르겠다.' 꿀꺽꿀꺽 마셨더니 이번엔 모두들 박수 치고 좋아라 웃어댄다. 3잔을 잔뜩 마셨는데 그날은 3,600m고지대에서 마신 술이라 평소보다 더 일찍 술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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