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가장 적합해 보이는 어떤 전형적인 대답을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행복이 얼마나 덧없으며 행복에 부여된 동기 또한 얼마나 개인과 시대, 문명에 따라 다르게 형성돼왔는지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행복은 명상에 있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인 행동에도 있고, 영혼에 있는 것만큼이나 감각적인 만족에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은 빈곤만큼이나 번영에, 범죄만큼이나 미덕에, 이기주의적인 쾌락만큼이나 공동체적 실천에도 있다. 행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온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므로 우리는 행복의 현존과 필요성을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행복은 우리에게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엇’을 추구하게 하는 계기이자 구실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의 구체적인 대상에 가 닿게 되는 순간, 행복은 스스로 분해돼 저절로 어디론가 이동하며 우리를 욕망의 저 끝자락, 욕망의 텅 빈 공허한 지점으로 데려간다. 행복은 가볍고 부드러우나 깨지기 쉬운 것,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한껏 부풀어 오른 비누거품 같은 것이다. 현실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깨기 위해 행복 옆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서문」중에서
축제에서 행복은 세계가 스스로 만들어낸 증여(贈與)를 의미한다. 『친족의 기본구조』(1967)에서 레비-스트로스는 마르셀 모스가 유명한 저서 『증여론』에서 구상했던 이론을 다시 활용하면서, 연말 축제의 지출을 “거대한 포틀래치 문화”와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포틀래치 문화는 북아메리카 북동쪽에 있는 부족뿐 아니라 멜라네시아족이나 파푸아족 사이에서도 이뤄졌던 일종의 교환을 일컫는다. 포틀래치 문화는 사회적·경제적·종교적·주술적·상징적·법률적·정서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는 “전적으로 사회적인 결과물”이며, 사회를 재생산하게 하는 역동성이자 심지어 “사회의 본질 자체”인 상호성의 원칙(주기, 받기, 돌려주기의 결과를 초래하는 원칙)에 바탕을 둔다.
신성이 세계와 인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듯이 타인에게 ‘주기’나 ‘선물하기’는 인간적 차원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신성과 더불어 사회관계의 인간적·수평적 차원을 수직적·상징적·종교적 관계로 바꾸도록 인도한다. 타인에게 ‘주기’나 ‘선물하기’는 신이 내린 보편적인 증여의 낙원적인 상태를 재건하는 행위다. 이런 증여를 실행하면서 상징적으로 세계는 현실의 관용적인 총체를 생산하는 인간에게 주어진다. 신의 증여 없이는 축제도 없다. 증여는 신성과 상징적 총체의 부름에 인간이 자신을 의탁하는 행위다.
19세기 말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된 크리스마스 축제는 이런 점에서 아이들의 축제일 뿐 아니라 유년기의 축제이며, 기원을 축성하는 충만함 속에서 행복이 만개하는 인간 존재와 세계를 기념하는 축제라는 의미를 지닌다. 크리스마스에 신은 인간에게 예수라는 존재를 주었으며, 자연은 모든 생명체에게 태양을 회복시켜주며(축제는 대부분 동지冬至와 일치한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 바로 이렇게 축성(祝聖)의 시간과 천국의 충만함을 회복하는 신의 증여가 일반화된 논리가 성립한다.
우리는 모두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다. 우리가 갖춘 상징적 사고의 힘이 우리가 스스로 생명체의 정신적 차원을 믿게 해주기 때문이다. 최악의 비극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때조차 우리는 머나먼 행복의 지평선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 곁에는 늘 행복을 실현할 기술이 있다.
---「1부 1장. 천국의 인간」중에서
행복은 멜랑콜리라는 새로운 감정과 섞이고, 멜랑콜리는 인간을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는 동기가 될 수 있다. 예상되는 새로운 세계와 직면하는, 정의할 수 없는 슬픔을 시험하는 행복이 존재하고, 심지어 개척되지 않은 새로운 대륙을 탐색하거나 인간의 영혼을 어둡고 침침하게 만드는 심리적인 역설 속에서 결국 인간의 영혼을 동요시키는 감정의 무한한 복잡성을 음미하는 행복도 존재하게 된다.
이처럼 영혼이 확장되고 응집되는 반면에 신성한 이타성은 축소된다. 이 둘 사이에 모순을 만들고 멜랑콜리에서 행복의 기회를 만들어내는 인간심리학의 역설은 ‘숨은 신’에 대한 신학적인 의문을 대치한다는 데 있다. 인간으로 부활한 예수의 신학에 존재하는 모순(신인 동시에 인간이라는)을 완전히 뒤집은 행위는 이제부터 내면, 즉 심리학의 규율로 자리 잡는다.
---「2부 1장. 감각의 추구」중에서
전체주의 위험이 정치적·경제적·기술적 유토피아 주변에서 발생한다고 가정하면 결국 인터넷이 그 잠재력을 통해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인터넷은 개인 간 정보 교환을 감시하기에 매우 유리하다. 예를 들어 전 세계를 감시하려고 미국이 개발한, 유명하면서도 베일에 싸여 있는 에슐롱 전산망의 야망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개인을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거미줄에 얽어놓았다. 인터넷은 이 분야에서 산업 기술의 잠재성을 그대로 실현한다. 인터넷 역시 철도, 전화, 수도, 전기, 가스 공급 시스템을 통해 19세기에 자리 잡은 테크놀로지 네트워크 중 하나다. 지난 세기부터 우리는 개인의 생각이나 이동이 포착되는 우주의 거미줄에 묶여 있으며, 산업 네트워크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신세가 됐다.
---「3부 3장. 역사의 불행」중에서
이처럼 부르주아 세계의 개인주의자들은 젊고 양호한 건강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영원성을 기약하려 한다. 이때 육체는 숭배의 대상으로 변한다. 육체에 대한 경배는 미용과 패션 산업으로 그 근간을 유지한다. 이제부터는 욕을 먹어도 선탠을 하거나, 몸을 근육으로 뒤덮거나, 날씬한 체형을 유지해야 한다. 오늘날 인체의 아름다움에 관한 규범을 말할 때 오로지 날씬함이라는 기준에 따라 규칙을 준수하는 것은 과거 종교의식에서 성스러움의 규칙을 준수하던 것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한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육체를 찬양하기에 이르렀으며, 가치와 외모에 대한 순응주의를 존재의 표지처럼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미용사와 약사는 정신분석가를 대신하게 됐고, 자신에 대한 지적이고 정신적인 염려는 규범적인 개인주의에 자리를 양보했다.
---「4부 3장. 상품화된 행복」중에서
따라서 행복을 느끼려면 온갖 종류의 원대한 희망을 과감히 포기할 줄 알아야 하며, 진정으로 우리에게 의존하고 우리의 가시권에 포착돼 있으며, 우리의 내부에서 비롯된 것들을 원할 줄 알아야 한다. 친밀한 것들과 하찮은 것들을 천천히 음미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는 하찮은 것에도 신이 임할 수 있다는 오래된 형이상학적 진리를 다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달리 말해 우리는 하찮은 것들의 행복,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의 행복이 만들어내는 우주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5부 1장. 희망의 원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