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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244쪽 | 344g | 145*210*17mm
ISBN13 9791161570969
ISBN10 1161570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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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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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령. 그리움과 애틋함을 환기시키는 이름이라는 것. 향수와 고독과 안쓰러움과 연민을 떠올리는 이름이라는 것. 불현듯 박재령을 큰아버지 가족들로부터 밀어내고 싶었으나 내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멀리 한국에서 자신의 조카가 왔을 때는 호들갑스럽게 맞아주거나 기쁨에 겨운 표정을 지은 적이 없으면서 별 볼일 없는 청년에게 왜 이리 따뜻한가. 그렇다고 큰아버지가 나에게 냉정하거나 무심했던 건 아니었다. 어쩌면 나를 볼 때마다 한국 어딘가에 숨어 있을, 몹시 찌그러진 상태로 살고 있을 자신의 동생을 떠올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자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p.37

사주는 완성된 학문이 아니며 그 운명의 궤적을 조금이나마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우리가 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그릇이 어떤지 깨닫고 나아갈 지침을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나아가는 지점과 물러서는 지점을 안다는 것, 그게 중요한 것이다.
--- p.50

나는 박재령과 명진애를 보면서 그들의 관계가 참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박재령은 조용한 호수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 사람이었고 명진애는 다가와서 그 호수에 유리 조각을 던지고 돌아가는 사람이었다.
꼬챙이로 찔러보고 달아난다는 느낌. 그녀는 그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는지 언제나 확인하려고 했고, 혹시 그가 조금이라도 무너졌는지 살피려고 했다. 사랑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면, 상대가 자유로울 수 있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것 아닌가. 명진애는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 p.116

사랑이었을까.
그가 뉴욕을 떠나기 전날, 나는 무작정 그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그가 사는 아파트 방 불은 꺼져 있었다. 어디 간 걸까. 미리 연락하지 않고 무작정 찾아간 나에게도 책임은 있었다. 그냥 돌아간다 해도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한두 시간 밖에서 서성거리다 결국 상심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현관 앞에 박재령의 신발이 놓여 있었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박재령은 큰아버지 부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에 있었구나. 갑자기 어떤 울음이 가슴속에서 밀려오는 것 같아 나는 그들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이층으로 올라가서 몸을 숨겼다.
--- p.126~127

세상에 인연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박재령과 나는 어떤 인연이었을까.
나는 끊임없이 생각했으나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가 떠난 후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언제부터 그가 내 곁에 있었다고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머물러 있던 자리에 다른 직원이 들어왔고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박재령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떠난 사람은 새로운 장소에서 적응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봄이 찾아오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질 때쯤 나는 거리를 걸으며 한 남자를 찾으려 했다.
누군가를 그토록 그리워하고 오래 생각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 p.132

그가 나에게 적어주었던 시 구절. 그러나 가난하고 아픈 기억을 그가 더 얹어준 셈이었다. 어떤 회한속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어떤 언덕과 언덕의 안개, 안개 속의 풍경, 풍경 속의 철창, 철창 속의 또 다른 감옥, 감옥 속의 구름, 구름 속의 뼈, 뼈 속의 피였다. 나는 어떤 신음을, 마음의 조급함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혼자 감당해내려고 했다. 단지 누군가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 대상이 박재령이었을 뿐인데, 느닷없는 괴로움을 느끼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랑의 달콤함 속에 수치가 있었고 수치 속에 괴로움이 있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형벌인가. 죄인가.
--- p.169

운명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인간에 대한 통찰과 신뢰, 삶을 대하는 겸허한 자세가 겸비되어 있지 않으면 결국 혹세무민으로 취급당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혹세무민이고 무엇이 혹세무민이 아닌가. 무엇이 길한 것이고 무엇이 흉한 것인가. 무엇이 넘치는 것이고 무엇이 부족한 것인가. 그 유무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의 이치를 다 깨우쳤다는 뜻인가. 사주 명리는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저 완성되어가는 하나의 과정 속에 있는 것뿐이다.
--- p.178

그의 말대로 외국으로 와서 무엇을 얻었나. 무엇을 잃었나. 아니 이것은 나의 운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바다를 건너야만 했다는 것. 누구의 조언이 아니라 누구의 부탁이 아니라 내 의지대로 살아왔다는 생각, 결국 내가 선택한 삶이었다. 몇 번의 계절이 지나갔고 몇 번의 슬픔과 몇 번의 기쁨과 몇 번의 빛이 오갔던 것뿐이었다. 삶은 계속되고 시간은 흐른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p.234

그곳에는 어떤 나무와 꽃이 피는가, 재령. 풀이 돋아나고 무덤이 있는가. 어떤 노을과 바람이 기다리나. 어떤 눈송이와 어떤 봄비가 사람을 적시나. 어떤 철새들이 날아다니나. 지난한 시절을 지나 멀리 이곳으로, 우수와 경칩을 지나, 소서와 대서를 지나, 한로로, 소설로, 너무 아픈 소설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지독한 추위가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한번은, 부디 죽음 속에서 삶을 기억하듯이, 새들이 혹한의 계절을 피해 다시 날아오르듯이, 도저한 인생의 한복판으로,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그 속에 삶과 죽음이 있듯이, 가난과 추억과 상실과 베이는 아픔이 있듯이, 다시 한번 그곳으로,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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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옆에 있는가. 누가 옆을 채우는가. 누가 스치는가, 누가 겹치는가. 우리는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만 또 운명이라는 말을 미워해왔다. 당신이 운명의 지도를 따르면서 사는 사람인지 지도를 잃어버린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을 때 이 소설은 머리를 친다. 당신이 살아야 할, 살아내야 할 지도는 어디에 있는가. 이 강렬한 소설 『재령』은 우리를 환희로 끓어오르게 함과 동시에 절벽 끝에 서 있게 한다. 따뜻한 파동이 몸을 극진하게 데워준다. 이 소설처럼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생의 인기척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낼 수 있다면, 그것도 마치 유적처럼…….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이 생에 남기고 간다 할지라도 그 비밀을 읽어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구원이며, 아모르 파티(운명애/amor fati)겠다.
- 이병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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