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복적으로 간통을 했어요. 매번 무너지면서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했어요.”
그 여성은 식사가 끝날 무렵 커피를 마시기 직전에 태연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이 명확하고도 간단한 고백 형식의 발언은, 당초 일시적일 것 같던 관계가 좀 더 긴밀하고, 돈독하고, 은밀한 관계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당시 나는 그저 점심만 먹고 끝낼 수 있는 관계를 상담으로 연결되는 직업적인 관계로 만드는 것이 싫었다. 나는 그 여성에게 내가 도움을 주기에 적당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키고 동료 의사를 추천하며 연락처를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거기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해였다!
어머니는 사랑의 첫 번째 대상이며,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성별에 관계없이 각자는 이 사랑을 모태로 이후의 모든 사랑을 구축한다. 여기서 다시 상호작용이 일어난다. 어머니가 아이의 성향에 너무 강도 높게 대응함으로써 아이가 그녀의 압통점(壓痛點)이 되면, 그녀는 사랑의 모태를 이용해 아이를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운 괴물로 만든 것이다. 나중에 그 아이가 선택하거나 그 아이를 위해 선택된 파트너가 도저히 그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통칭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단계가 개입된다.
아버지라는 조정자가 나타나 그의 아들이 어머니 뒤를 헛되이 쫓아 다니지 못하게 설득하는 것이다. 또 그의 딸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우게 하고 딸이 분리되기 두려워하는 어머니와는 다른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한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마리안이 마르쿠스라는 꿈에서나 볼 수 있는 남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반복하는 것이 필요할까? 동화 속의 남편-유명하고 돈 많은 예술가, 잘생기고 머리 좋고 다정다감하고 뛰어난 예술가, 좋은 사위, 좋은 친구이며, 친절하고 사려 깊고 민감하고 섹스도 잘했던 남편-그런 남편을 버리고, 그녀 스스로도 ‘사생활이 엉망진창인 존재’라고 표현했던 다비드를, 또 다른 여자를 쫓아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릴 게 분명한 다비드를 사랑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모험으로 인해 그녀 자신과 딸, 그리고 특히 남편에게 유감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그녀가 자신의 의식을 제어하기를 거부한 한계는 무엇인가?
또 다른 한 여성은 왜 자신이 우연히 만난 남자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남을 지속하면서 그에게 오럴섹스를 해주며 간통 관계를 유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에게 몸은 ‘주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몸은 남편에게만 줘요.”
그 남자는 그녀에게 입을 사용한 애무 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일시적인 관계를 갖는 남자들과는 항문섹스만을 하기 때문에 남편을 배신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여성과 비슷하다.
다른 남성은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가족들이 여름 바캉스를 간 사이에 여성들을 정복했다. 그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는데, 매일 동네를 바꾸면서 길거리에서 자신의 시선을 끄는 여성에게 접근했다. 오랜 경험에서 얻은 조심성을 발휘해서 30분 간격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150미터 간격으로 약속을 잡았다.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 이렇게 대비하면서 그는 매일 밤 서로 다른 두 여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다시 만나는 경우는 물론 없어요. 그러고 나면 1년 내내 조용하게 지낼 수 있어요. 전 아내만 사랑하고 곁눈질하지 않는 타입이에요.”
아버지의 개입은 아이들에게 지나친 모성을 모면하게 함으로써 아버지라는 존재가 배제되거나, 아이가 나르시시즘의 요소를 갖는 것을 막아주었다.
변태적인 관계에서 아이가 계속 어머니의 에로틱한 파트너가 된다면,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성생활에 위협을 받게 된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보완되기 보다는 아이와 보완되는 어머니는 그녀 아이의 정체성과 성적인 완전성을 위협한다.
부부 내에서 민주적인 이상이 자리 잡고 아버지의 중심적인 역할에 대한 사회적인 지원이 결정적으로 없어짐에 따라, 이전에 존재했던 모든 조건이 변화했다.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