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쭈물 살다 내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배에 칼빵을 맞은 채, 수도의 어느 번화가 뒷골목에 쓰러진 카루나는 생각했다.
‘역시 진작 보석을 좀 챙겨서 도망가야 했어.’
물론 그런 계획 및 시도를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언제나 실패해서 문제였지.
바로 오늘까지 그녀의 이름은 클레이엔이었다. 클레이엔 리돌로프스코 폰 마카레나. 파라 제국의 명문 귀족 가문, 마카레나 백작가의 무남독녀 외동딸. 아니, 외동딸인 척하는 대역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10년간 클레이엔의 대역으로 살아왔던 삶을 끝내고 새로운 신분으로 살게 될 예정이었다.
‘뭐, 이렇게 될 줄 몰랐다는 건 거짓말이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배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10년간 자신의 아버지였던 마카레나 백작을 생각했다. 비쩍 마른 생쥐같이 생겨서는 속이 시커멓고 음험하던 귀족 나리.
카루나를 대역으로 써먹는 10여 년 내내, 마카레나 백작은 언제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카루나가 언제 도망칠까, 딴짓을 하진 않을까, 혹은 배신을 할까 감시했다.
‘역시 귀족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어릴 적, 뒷골목에서 도둑질로 근근이 먹고살며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봤던 카루나도 혀를 내두를 만큼 철저한 인간이었다.
그래도 인간적으로 10년 이상 부려 먹었으면 미안해서라도 곱게 살려 보내 주진 않을까 믿었건만. 아니, 믿고 싶었건만. 역시나 마카레나 백작은 상도덕 따위가 없는 귀족이었다.
‘애초부터 귀족 나리가 나 같은 천것한테 의리를 지킬 리가 없지.’
쿨럭쿨럭. 카루나는 피를 한 움큼 쏟아 냈다. 오물로 얼룩진 거리에 피 웅덩이가 고였다.
‘내 몸에 이렇게 피가 많았구나.’
단도가 꽂힌 배에서 콸콸 피가 새어 나오는데, 또 입에서 피를 뿜다니.
“하하, 흐윽…….”
이 꼴을 하고서도 웃음이 나왔다. 우스웠다. 지금의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카루나는 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족 영애였다. 오늘 밤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의 주인공은 그녀였다.
황태자와 첫 춤을 췄다. 무도회에 참석한 모든 귀족의 아부와 영혼 없는 찬사 속에 파묻혔다. 그렇게 클레이엔 대역으로서 그녀의 역할이 끝났다. 그녀는 약속대로 무대를 내려왔고, 약속과 다르게 칼빵을 맞았다.
‘젠, 장…….’
(중략)
카루나는 이런 핏빛 결말을 예상했다. 그녀의 쓰임이 다하면 마카레나 백작이 그녀를 무사히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래서 그 전에 도망치려고도 노력했다. 이렇게 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도무지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마카레나 백작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었다. 성질머리가 좀 더럽고 사나웠을 뿐, 결국 마카레나 백작의 손아귀 위에서 움직였다. 마카레나 백작의 눈을 피해 겨우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왼쪽 가슴과 배에 보호대를 설치하는 것뿐이었다.
마카레나 백작이 거느린 암살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걸 좋아했다. 심장 혹은 배. 일격을 가해 치명상을 입혀 죽이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카루나는 자신의 유일한 재산인 낡은 브로치를 왼쪽 가슴에 고정시켰다. 또 밤마다 몰래 모은 얇은 비단 조각을 여러 겹 덧대 바느질했다. 바느질한 것을 배에 여러 겹 둘렀다. 이 보호대 때문에 조금이라도 칼이 덜 박혔길 바랄 따름이었다.
카루나는 쿨럭, 피를 뱉어내며 입을 벌렸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빨 뒤쪽을 더듬어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내내 물고 있던, 미용 금가루를 담아 놓던 작고 얇은 유리병이었다.
새끼손가락 손톱만 한 병 안에 든 마법의 약을 목구멍으로 흘려 넣었다. 피비린내가 입 안에 가득한데도 시큼한 맛이 났다. 너무 맛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정말 맛이 없어서 눈물이 났다.
“흐으…….”
이게, 고작 이게 그녀의 마지막 대비였다. 아니 도박이었다. 그간 몰래 한두 개씩 장신구를 빼돌려 모은 돈으로 마탑에서 시간을 연구하는 마법사에게 마법의 약을 사는 게.
‘시간을 되돌려 주는 마법의 약입니다. 물론 효능은 있겠지만……. 저, 정말로 있을 겁니다. 아마? 아주 장담은 못 해요. 수식과 이론은 완벽한데, 진짜 실험을 해 보진 못했거든요. 일단 8년 하고 5일, 다섯 시간 전으로 돌아가도록 만들긴 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마탑에서도 괴짜 취급을 받는다는 마법사였다. 그는 재작년, 황궁으로 초대되어 황태자와 귀족들 앞에서 자신의 연구를 발표했다. 자신의 연구를 지원해 줄 후원자를 찾고자 나선 것이었다. 하나 황태자와 귀족들은 그를 어릿광대 취급했다. 그들은 허황된 마법사의 이론을 들으며 웃어 댔다.
웃지 않은 건 카루나뿐이었다.
그날 이후 카루나는 남몰래 그를 지원했다. 아니, 남몰래라고 해도 마카레나 백작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카루나가 쓸데없는 희망을 품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카루나가 그 출신에 걸맞은 천박한 취향을 지우지 못하고 유흥거리를 찾는 거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물이 이 한 모금도 안 되는 마법의 약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일이었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뒷골목의 소매치기로 살아온 10년. 마카레나 백작의 눈에 들어 클레이엔의 대역으로 살아온 10년. 더없이 현실적인 삶이었다.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죽음의 문턱 앞에 선 그녀가 손에 쥔 건, 너무도 비현실적인 기적에 대한 소망이었다.
“커흑, 흐, 흐흐…….”
웃음이 났다. 웃음을 타고 코와 입에서 꾸역꾸역 피가 흘렀다. 시야도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톡.
카루나의 손에서 유리병이 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해가 떠오를 텐데, 이상하게도 온 세상이 까맸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