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1935년 최승희, 제국 일본 무용계의 여왕으로 등극하다”
최승희가 당대 독보적인 조선의 무희였음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1946년 월북 이후 1988년 해금 조치에 이르기까지 약 40여 년간 한국에서 최승희 연구는 금지의 대상이었다. 더욱이 식민지 조선인이 ‘동양의 무희’ 자격을 취하는 일이란 일본 군부의 후원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점, 그리고 월북 이후 북한의 체제 선전에 기여해왔던 그녀의 이력은 일제의 식민지를 경험하고 냉전 시기 공산주의를 적대시해왔던 남한에서는 불편하고 불순한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43
제2장 “941년 리샹란, 관객이 일본극장을 일곱 바퀴 반 에워싸다”
‘만약 일본군이 베이징으로 쳐들어온다면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 토론회장에서 리샹란은 “저는 베이징의 성벽에 서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베이징 성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중국군과 일본군의 총탄을 양쪽에서 맞으면서 가장 빨리 죽는 길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였을까. 훗날 이날의 참담한 심정에 대해 리샹란은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급우들과 함께 항일을 외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 p.74
제3장 “1935년 레니 리펜슈탈, 〈의지의 승리〉로 히틀러를 영웅화하다”
독일의 라이 뮐러가 감독한 다큐멘터리 〈레니 리펜슈탈의 놀랍고도 끔찍한 삶〉에서 레니는 다음과 같이 항변했다. “나는 〈의지의 승리〉를 만든 것에 대해 후회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살았던 것을 후회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입에 올린 적도 없었고, 나치당에 가입한 적도 없습니다. 내가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나요? 내가 다른 사람을 배신이라도 했습니까? 도대체 왜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하죠?”
--- p.102
제4장 “1939년 마를레네 디트리히, 미국으로의 망명을 감행하다”
디트리히는 미연방정부와 협력해 알래스카, 그린란드, 북아프리카, 유럽의 각 지역에 이르기까지 미군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위험한 전쟁터라도 마다하지 않고 위문공연과 병원 근무를 섰다. 또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디트리히 특유의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로 연합군의 사기를 진작하는 역할에 그 누구보다 충실하게 임하면서 이른바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녀는 특히 그 어떤 스타들보다 전쟁 채권을 많이 팔았던 것으로도 정평이 나 있었는데, 훗날 오스트리아계 미국인 감독인 빌리 와일더는 디트리히가 아이젠하워보다도 훨씬 더 최전방에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 p.139
제5장 “1955년 최승희, 북한 최고 인민배우 칭호를 받다”
냉전체제가 끝나고 과거 역사를 조망할 만한 시간적 거리감이 확보되자 망각의 공동체는 또다시 애도의 공동체로 변모했다. 한국 신무용사의 선구인 최승희의 무용 전체를 망각해버리기에는 근대 신문화의 유산에 대한 처리가 불안정하고 불합리했을 뿐만 아니라 그 망각이라는 것이 결국은 국가에 의해 강요된 희생의 제물과도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애도의 행위에서 새로운 굴절이 나타났다. 사후의 관점에서 볼 때 최승희의 ‘친일’과 ‘종북’이란 시대와 국가가 부여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을 뿐, 최승희의 무용에는 ‘조선적인 것’, ‘동양적인 것’을 발현한 자주적인 민족주의적 심성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 최승희를 망각해왔던 애도의 공동체는 그녀를 다시 민족주의자로 복원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사죄를 대신했다.
--- p.213
제6장 “1974년 야마구치 요시코, 자민당 참의원에 당선되다”
‘리샹란’이라는 한 인물이 야마구치 요시코, 판슈화, 리코란, 이향란, 이홍란, 셜리 야마구치, 셜리 노구치, 자밀라, 오타카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시대와 지역의 맥락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호명되었던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리샹란은 최종적으로 특정 국민국가에 귀속될 수 없는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전전 ‘리샹란’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가졌던 이 여성은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일본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대결해야만 했고, 전후에 ‘야마구치 요시코’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회귀한 이 여성은 전시하에 구축된 ‘리샹란’이라는 환영과 정면대결해야만 했다.
--- p.241~242
제7장 “1974년 레니 리펜슈탈, 《누바족의 최후》가 최고의 걸작으로 선정되다”
나치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전후 독일에서 레니가 카메라를 든다는 행위는 과거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히틀러를 향해 카메라를 들었던 행위와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대다수의 독일인들은 레니에게 나치 협력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돌림으로써 그녀의 영화계 복귀를 차단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나치에 의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 문제를 둘러싸고 ‘독일 국민’이라는 집합명사가 갖고 있는 집단적 정체성은 ‘집합적 유죄’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인의 대다수가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해 잘 몰랐다는 사실에 대해 ‘집합적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구별되는 다양한 코드들을 가해자로 만들고 배제함으로써 자신들의 ‘모르쇠’ 순수도를 보다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 p.266~267
제8장 “2002년 마를레네 디트리히, 독일 명예시민으로 추서되다”
그녀가 살아생전 자신의 조국인 독일로 귀환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국가적 오류가 개인의 일상에 침범한 안타까움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달리 하면 디트리히는 히틀러의 나치 이념을 저버리는 대신 연합군의 전쟁 프로파간다를 매우 충실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즉 나치 독일을 거부한 디트리히에 대한 후대의 우호적인 평가에는 그녀가 냉전 시기 미국 할리우드의 섹시 심벌이 되어 자유민주주의의 이상을 수호하기 위해 미국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했다는 사실은 도외시되어 있는 것이다. 그가 히틀러의 후원을 저버리고 나치 제국의 이념을 거부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에서 연합군을 위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했던 행위 그 자체는 최승희와 리샹란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