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는 그런 작은 공간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을 통해 세계를 다루고 우주를 펼쳐 보여야 한다. 어떤 전략이 가능할까? 가장 쉬운 방법은 주인공이 사는 동네를 세계의 중심지 혹은 우주적인 이벤트가 일어나는 바로 그 지역에 갖다 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주 공항이 직장인 서비스직 노동자 이야기처럼, 주인공의 생활 반경 자체를 우주와 관련된 공간으로 옮겨버릴 수 있다. 아니면 이웃집 여자와 점심을 먹었는데 그가 내일모레 화성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경우처럼, 평범해 보이는 일상 공간이 갑자기 우주와 이어지게 만들 수도 있다. 〔……〕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런 공간에서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인의 생활공간에는 우주가 없다. 사실은 대양도 없고 대륙도 없었다. 묘하게도 한국인은 지구의 한구석에 웅크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 애초에 구석이 있을 수 없는 구형의 행성에서 말이다.
--- pp.32-34
SF는 과학소설이지만, 과학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올 필요는 없다. 과학의 무게에 짓눌려서도 안 된다. 소설 바깥, 즉 현실 세계의 과학자는 고개를 젓더라도 작품 안에 등장하는 과학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도 있다. 작가가 자기 작품 안에서 엄밀하고 논리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지, 현실 세계의 과학자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현대 과학에 따르면 시간 여행은 아예 불가능하다. 과학적 고증에 충실한 작가라면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내야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초광속 비행도 마찬가지다. 우주 전쟁은 애초에 다 거짓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SF가 과학적인 태도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사이언스를 그대로 옮겨와서가 아니라 사이언스가 추구하는 무엇인가를, 막스 베버식 본질을 담아냈다고 믿기 때문이다.
--- pp.66-67
SF는 상상하는 문학이다. 하지만 더는 신기한 아이디어로만 승부를 거는 문학은 아니다. SF에서 가치 있는 상상이란 다른 것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통합적 상상을 말한다. 그렇게 진화해왔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상상력을 통해 작가는 언젠가 현실이 될 세상의 단편들을 하나하나 퍼즐처럼 이어 붙일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 설계도를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소설에서 ‘세계’란 작가가 묘사한 객관적 사물의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세계에 대한 작가 고유의 해석에 가깝다.
--- pp.82-84
가내 등단은 이 상황을 타개해가는 과정이다. 내가 만들어낸 말이고 누구나 알아듣는 말은 아니니 주의해서 사용하자. 가내 등단의 목표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속 편하게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집필에 들어가기 전,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단계의 작업을 당당하게 해나가는 일이다. 작가는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일을 하는 중이라지만, 막상 해보면 기나긴 구상 단계를 지나는 작가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할 때가 있다. 많은 구상 과정이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정말로 아무것도 안 한 게 되는 것이다.
--- p.113
성실하게 사는 일은 가계와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연습을 꾸준히 하고 글이 계속 잘 써지면 근육처럼 올라오는 자존감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남의 성공은 힘들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잘되면 나 역시 잘될 것이다. 직관과는 너무 다르지만, 우리는 결국 대체재가 아니니까.
특히 친한 동료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되도록 짧게 절망한 다음 묻어갈 방법을 재빨리 모색하자. 옹색하게 들리겠지만, 먼 길을 함께 가는 사이란 그런 것이다. 그가 낸 길을 수월하게 따라간 다음, 내가 앞서는 날이 오면 그를 위해 길을 내는 것.
--- pp.147-48
일상에서 경험하는 나보다 훨씬 훌륭한 내가 쓰는 글. 내가 ‘작가의 말’을 쓰기가 꺼려지는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이다. 서술자가 몇 달간 공들여 쓴 소설은, 자연인인 작가 본인이 잠깐의 감흥으로 쥐어 짜낸 자기 글에 대한 감상문보다 몇 배는 훌륭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직업이 작가인 것이다. 그런데도 ‘작가의 말’은 보통 책의 맨 뒤에 들어간다.
문제집으로 치면 모범 답안이 들어가는 위치다. ‘작가의 말’은 소설 맨 뒤에 등장해서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 역할을 할 위험이 있는 부록이다. 「작품 해설」도 비슷한 위치에 들어가지만, 적어도 작가 본인이 쓴 말은 아니므로 정답을 이야기하는 역할까지는 하지 못한다. 그런데 ‘작가의 말’은 누가 봐도 정답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품에 대해 무슨 의미심장한 말이라도 했다가는, 작품에 대한 작가의 결정적인 해석으로 오해받기 딱 좋다. 이것은 월권이다. 나에 대한 나의 월권이다.
--- pp.178-179
나에게 중요했던 계기는 동료 작가다. 한국 SF는 비평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이다.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 상당 부분이 ‘SF란 무엇인가’ ‘SF와 판타지는 어떻게 다른가’ ‘SF와 과학의 관계는 어때야 하는가’와 같은 추상적인 질문에 머물러 있었다. 〔……〕 그러면 SF 작가는 창작에 필요한 안목을 어떻게 다듬고 향상시킬 수 있었을까? 비결은 동료 작가를 통해서다. SF 작가들은 공통의 가치를 공유한다. 아직 글로 정착된 적이 없고 체계적인 조사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내 동료 작가들은 “한국 SF”라는 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 대강 어떤 것들인지 감각으로 알고 있다.
--- p.203
SF에 담긴 미래는 현재의 반영이다. 단지 현재가 반영되는 방식이 다소 복잡할 뿐이다. 예를 들어 여러 SF 작품에서 외계 행성에 주둔한 인간 군대의 병종이 하필 해병대인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해병대가 우주개발에 깊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까? 그럴 리가 없다. 어느 나라든 우주는 잠재적으로 공군의 진출 영역이다. 그렇다면 왜 해병대가 우주로 진출하는 SF가 자주 눈에 띌까? 현실의 지구에서 해외에 파병되는 미군의 주력이 하필 해병대인 탓이다.
다시 고증 문제로 돌아가보자. 미국 SF에 나와는 해병대를, 이를테면 「스타크래프트」의 주력 보병인 ‘마린’ 같은 것을, 공군이나 우주군으로 바꾸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해병대가 나가 있는 이야기와 공군이 나가 있는 이야기는 각각 현실의 다른 측면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 p.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