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도망치는 거야?”
그 말 한마디가 발목을 잡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텐데.
레슬리는 고개를 휙 돌려 엘리를 바라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놀랍네. 용케 고개를 들고 다니는 게, 너무 놀라워. 내가 아는 너라면 집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못 할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엘리가 입꼬리를 뒤틀려 웃어 보였다. 어딘가 패를 숨긴 듯한 얼굴에 레슬리는 눈가를 움찔거렸다.
“내가 누구 좋아하라고? 미쳤니?”
“응, 내가 보기엔 너 미친것 같네. 더 할 말 없어.”
다시 몸을 돌리자, 엘리가 거칠게 레슬리의 팔목을 낚아챘다.
“야, 너…….”
“무례를 저지르지 마세요, 스페라도 영애.”
일부러 레슬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목소리를 키웠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물론, 멀리서 이야기하던 펠론과 다른 기사의 시선도 세 사람에게 닿았다.
“……지금 공녀가 됐다고 유세를 부리나 본데.”
“유세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겁니다. 제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나요? 나는 이제 이 제국의 유일한 공녀라고.”
그렇게 말하며 레슬리는 거칠게 엘리의 팔을 쳐 냈다. 엘리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레슬리는 덤덤하게 냉담한 눈으로 엘리를 바라보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셀바토르 공작가로 편지를 보내 약속을 잡으세요. 무례하게 이렇게 사람을 불러 세우지 말고. 그리고 스페라도 영애는 제대로 인사를 하는 법조차 배우지 못한 모양이에요. 가장 기초적인 예법서에도 나와 있는 예절인데.”
그제야 레슬리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서렸다. 평소의 웃음이 아니라 명백한 조롱이 담긴 웃음이었다. 엘리의 지식은 레슬리였으니까. 엘리는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와 같은 상태였다.
지나가던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그리고 펠론과 기사 한 명이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까득. 작게 이를 간 엘리는 고개를 되레 치켜세우더니 레슬리에게 속삭였다.
“네가 언제까지 그 가짜 공녀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셀바토르 공작의 보호 아래 있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그리고 잊지 마렴.”
갑자기 엘리는 레슬리를 보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때마침 창문을 타고 들어온 햇빛이 마치 성자처럼 엘리를 감싸 안았다. 하지만 레슬리에게 속삭이는 말은 너무도 소름끼치는 말이었다.
“아무리 네가 셀바토르라는 고귀한 이름으로 포장을 해도, 네 몸에 흐르고 있는 피는 스페라도 가문의 것. 네가 그렇게 외치던 살인마들의 피란 말이야. 그 피를 언제까지 네가 숨길 수 있을까?”
후후. 다시 작은 웃음을 흘리며 이번엔 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언제까지라 생각하시나요, 셀바토르 공녀님?”
왜 ‘셀바토르 공녀님’이라는 말이 레슬리 귀에는 가짜라고 들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