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여자라면 당연히 당장 꺼지라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화를 내야 맞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멜린은 가만히 있었다. 멍하니, 심지어 어딘가에 홀린 듯했다. 멜린은 궁금했다. 이 엉뚱한 매력을 지닌 새로운 로맨티스트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마침내 멜린은 이불을 가슴 앞에 움켜쥐고 몸을 일으켜, 천천히 지기한테 다가갔다. 한 마리 고양이처럼 얌전하게.
멜린은 자신의 입술을 지기의 입술에 닿을 듯 말듯 가져간 채 아주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인생 한 번뿐이잖아.”
멜린은 지기의 키스를 기다리며 두 눈을 감고 그 순간을 영원히 남기려 했다. 야무진 꿈이었다. 지기는 키스는커녕 한 번 안아 주지도 않고 그저 멜린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너 참 마음에 들어. 적어도 넌 귀찮게 구는 여자애들과는 달라 보여.”
---pp. 34~35
멜린이 원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것이 선의인지 악의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싸구려 샴페인 한 잔을 앞에 두고 마냥 행복해하며 결혼 30주년을 기념하는 부부의 모습은 그 옛날 전설적인 스토리로 남겨진 지 오래되었으니까.
서프라이즈, 판타지. 멜린이 바라는 것은 그뿐이었다. 지기를 만나기 전까지 몇 번 있지도 않았던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바랐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멜린은 남자 보는 눈이 낮아진 상태였다. 사랑을 정치로 잘못 알고 ‘연애 임기’ 두 차례를 무능력하게 치른 탓이었다.
첫 번째 남자는 편의만 생각하고 골랐다. 멜린의 옆집에 사는 남자였다. 두 번째 남자한테는 질질 끌려다녔다. 남자 에서 맥주 값까지 냈고, 멜린은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편한 이든 남자가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억지로 쥐어 짜낸 단편적인 감정은 멜린에게 별다른 화학 작용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지기와는 달랐다.
멜린의 불행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pp. 44~45
“난 원칙이 있는 사람이야! 이 여자애가 날 사랑하고 있다고. 그런데 내가 걔를 차면 걔 마음이 어떻겠냐. 걔한테는 지구 종말보다 더한 상황이라고. 내가 장담컨대 걔는 미쳐 버리고 말 거야.”
…중략…
“그건 정말 아니야. 그렇게는 못 해. 사람이 양심이라는 게 있지. 어떻게든 나보다 더 괜찮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 거라고 걔를 설득해 봐야지. 분명히 널 사랑해 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지기의 말이 끝나고 잠시 뒤, 잠자코 있던 파리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나지막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 여자애가 널 차게 만들 거라는 거지? 그건 너무 복잡하지 않겠냐?”
---p. 79
노에미는 말을 아끼고 신비주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충고했다.
가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제1 원칙이었다. 하지만 이 원칙은 제2 원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없는 법. 제2 원칙은 경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해 줄 사람이 바로 파브리스였다.
---p. 110
멜린은 기뻐 날뛰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가까스로. 분명히 소리를 지르며 지기의 품 안에 안길 순간은 아니었다. 판정승은 성에 차지 않았다. 확실한 보장과 약속, 맹세를 원했다. 지기는 사정거리 안에 있었다. 이제 제대로 펀치를 한방 날려 멋지게 KO승을 따는 일만 남아 있었다.
“날 위해 뭘 해 줄 건데?”
---p. 143
아주 먼 옛날부터 남과 여가 줄곧 벌여 온 유혹 게임은, 어느 순간 여자 이 완전히 주도권을 손에 넣었고, 이로 인해 모든 게 바뀌었다.
요즘 남자는 이른바 ‘스트리밍 시대’의 도래로 언제든 포르노를 실컷 볼 수 있게 되면서 사냥꾼의 본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쟁 기술을 잊었고, 여자를 정복하는 데에 목말라하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디지털 혁신으로 인해 남자는 모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훔쳐보는 변태 성욕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제 모든 남자의 욕망은 하나같이 두세 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저 자신의 포르노 취향에 딱 들어맞는 태그를 찾는 일에 열을 올릴 뿐이었다.
늘 모니터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꿈꿔 오던 판타지와 맞닥뜨리는 순간이 오면 그제야 겨우 고개를 드는 정도였다. 여자가 남자한테 두려운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애정 생활에도 혁명의 바람이 불면서 여자를 만나는 일에도 타산적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되었다.
결국 남자들이 더 이상 어느 젖가슴에 열중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까지 오고야 말았다. 지켜 줘야 할지 받들어야 할지,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드러내야 할지 살짝 비켜서 있어야 할지, 지배해야 할지 고개를 숙여야 할지, 세상이 자기한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 낼 수 없게 되자, 남자들은 계란판 위를 걷듯 그저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여자가 얻어걸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pp. 196~197
“내가 앞으로 이런 남자를 몇 명이나 더 만날 것 같니? 응, 몇 명이나? 젊은 시절은 이제 다 지나갔어, 더 이상 환상을 품어서는 안 돼, 엉덩이도 벌써 처졌다고. …중략… 난 쿠거족19)이 되고 싶지 않아. 난 수영장이 딸린 집을 원해. 남편과 아이들을 원한다고.”
멜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노에미를 쳐다보았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더러 자유분방한 삶을 예찬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이리도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거야? …중략…
“불쌍하기도 하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있는 그대로 다 믿다가는 넌 평생 이대로 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 주길 원하는데? 사람들은 누구나 거짓말도 하고 배신도 할 수 있는 거야. 인생이란 게 그래.”
---p. 204
그러는 동안에 나태함부터 시작해 불성실함, 과시벽, 나르시시즘, 단체 생활 부적응자의 모습까지 자신이 가진 결점이라는 결점은 있는 대로 보여 주며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지기’라는 이름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제작진도 곧바로 지기를 해당 시즌의 주요 인물로 그려 냈다. 지기가 ‘난 천재다.’ ‘어느 개자식이 내 치즈를 먹은 거야?’ ‘내 직업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등등 사차원적인 대사를 툭툭 던지는 덕분에 프로그램이 화젯거리가 되고 시청률도 올랐다.
지기가 게임에 실패하거나 도전 참여를 거부할 때마다 어떻게든 지기를 살려 내려는 시청자들로부터 압도적인 표를 얻다 보니, 방송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지려 하는 무능한 집단’을 일명 ‘지기 세대’라고 부르며 ‘지기’라는 인물을 띄워 하나의 신드롬을 일으키려고 했다.
---p. 226
지기는 여자가 필요한 때는 오직 결핍된 순간뿐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였다. 사랑 따위에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지기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후세에 길이 남을 작품을 창작하는 일이었다. 욕구가 불쑥 치솟으면 혼자 힘으로 욕구를 달랬다. 혼자, 재빨리. 그러다가 어디에선가 마스터베이션을 자주 하면 대머리가 될 수도 있다는 글을 보고 난 뒤에야 누군가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자기가 원할 때 언제든 달려올 준비가 된 여자. 자기가 기운 낼 수 있게 애쓰는 여자. 자주 만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 자신의 스케줄을 군말 없이 따르는 여자.
금요일과 토요일, 정 못 참겠으면 수요일 정도로만 정해 놓고 만나도록 말이다. 이게 웬 ‘파트타임 러버’인가.
---pp. 37
사기 전에 먼저 써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려보내고, 언제든지 원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게 하는 것. 이런 것이 나쁠 게 뭐가 있을까? 사랑이라고 해서 이러한 소비 규칙을 적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실연 남녀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분개할 일이겠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의심이 판을 치는 세태 속에서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이제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사람의 자리를 로봇이나 섹스토이, 아니면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대신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결국 한 줄로 요약되었다. 그저 너무도 복잡한 일이라고.
---pp. 60~61
과학계와 문학계에서 사랑에도 사용 가능 햇수가 있다는 것이 일반론이 되고 난 뒤로 사람들은 경제학자와 사회학자에게 어째서 인생은 둘이서만 살아가야 하는지 물었다.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게 그나마 남는 장사니까. 장부를 들춰보면 항상 돈을 여러 군데 나눠 쓴 이 손해를 더 많이 봤다. 결국 애정이 점차 식어 가며 감가상각과 함께 그 자산 가치도 떨어졌다. 커플은 작은 회사가 되고 말았다. 최대 이윤을 낼 수 있도록 운영했다. 경력 관리부터 성과에 따른 인센티브 지급, 필요하면 다시 사기를 끌어 올리는 차원에서 세미나까지 열었다. 그렇다면 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람들은 행복보다 안락을 선호했다.
---pp. 208~209
“쉿, 그만해. 지금 이건 게임이 아냐. 네 인생에 대한 이야기잖아. 운에 맡길 문제가 아니지. 무엇보다 너를 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생각해 봐. 널 더 많이 웃겨 주거나 속궁합이 더 잘 맞는 사람을 선택하라는 게 아냐. 타협점을 찾는 거지. 넌 지금 더 나은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게 아니라, 덜 나쁜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네가 늙어 가는 모습을 보고도 젊은 여비서나 베이비시터한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남자. 인물이 너무 좋은 남자는 보나마나 바람을 피울 테고, 야망이 너무 큰 남자는 늘 너를 뒷전에 놓겠지. 내 경험상 불꽃 같은 사랑은 믿을 게 못 돼. 돌풍처럼 불어닥친 격정적인 사랑, 그거 좋지. 하지만 한바탕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그걸로 끝이야. 소소한 감정만 오래 남는 법이지. 담담히 쌓인 소소한 감정은 그리 멋지거나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네가 그런 것으로부터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순 있잖니. 있잖아, 한 가지만 명심해. 네가 어떤 사랑, 어떤 미래를 꿈꾸든 환상을 쫓으면 안 돼.”
---p.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