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부는 지금 여기 있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yath?bh?ta, 如實)’ 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만들어 놓은 영상(nimitta, 相, 이미지)을 투사시켜서 본다. 마음의 흐름(cittasa?t?ti, 心相續)은 경험이 산출한 이미지에 대한 반응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바로 그 사태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지닌 상(相, 이미지)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있는 그대로의 라일락 향기 대신 라일락 향기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것뿐이다. 이렇게 마음의 내용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유정은 범부가 된다. 그렇다면, 경험이 남긴 잠재적 성향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유가행파는 우리의 육체가 스스로의 선택이 담긴 생물학적 결과이고, 습관적 경향성은 감각/지각 능력[六根]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고 한다.
--- p.16
유정인 인간을 설명하는 불교의 전통적 설명 방식의 하나가 십팔계이다. 유식 사상에 의하면 다섯 가지 감각 능력/기관인 오근과 그 오근을 장악하고 있는 자아의식인 염오의로서의 의근, 그에 상응하는 여섯 가지 대상(六境), 그 대상을 아닌 여섯 가지 식(六識), 이렇게 18가지의 생멸로써 인간을 설명한다.
그런데 이 십팔계의 존재 상태는 다름 아닌 과거 경험의 종자를 가진 아뢰야식과 관련된다. 경험의 흔적을 종자(b?ja)라는 에너지 형태로 가진 아뢰야식은 이 찰나 상태와 緣起라는 존재 방식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찰나의 상태인 연생법으로서의 십팔계는 아뢰야식이라는 조건에 의해 생기한 상태이다.
--- p.41
인간 존재이자 인식 구조인 18계는 습관적 경향성의 결과로서의 조건에 의해 생긴 존재이나, 의식은 18계 전체를 개념화하여 실체적 존재로 오인하여 나의 것으로 만든다. ‘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정체성조차도 내가 의식하는 ‘망상의 나’일 뿐이다. 유정의 고통은 의식 상태를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데 있다.
실체적 존재로 인식하는 상황이 사라질 때, 대상만이 아니라 보는 주관 역시 망상이므로 양자가 사라질 때, 바로 그때 자기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상태가 된다. 이것을 유식성, 원성실성, 공성, 진여, 공상, 법계, 법성라고 부른다. 특히 그 본질을 진여, 공상(s?manyalak?a?a, 共相)이라 하는데, 이것은 유위법의 공통적 특질인 무상성 · 고성 · 무아성의 異名이다.
일련의 수행 과정을 통해서 無常을 무상으로 아는(慧)것이 아니라, 무상과 특수한 앎(慧)이 하나가 되는 상태에 이르는데 그때 비로소 유정의 삶, 자아 중심적 삶은 종식된다. 이것을 유식 사상은 무분별지와 共相이 하나가 된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유식이란 오직 조건에 의해 생기한 현상뿐 그 어디에도 보고 듣고 생각하는 자아는 없으며(人無我), 찰나 생멸하는 그 현상들조차도 우리가 인식하는 언어적 대상이 되지 않는다(法無我)는 것이다.
--- p.134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체험적 성찰은 의타기한 緣生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즉 변화 생성의 세계를 비실체적으로 본다. 사물을 고정시키고 자신이 경험한 바를 판단의 중심에 놓는 실체적 사유는 수행을 통해 유동적 사고로 전환된다. 존재의 본질을 경험하기 전까지 모든 이해와 관점은 상대적이지만, 존재의 본질을 경험하고 나면 일체 유정의 존재가 무아성의 존재이고 法界라는 지혜가 생기한다. 자신의 본질을 경험한 보살은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를 가진다. 말하자면 존재의 변화, 그에 따른 인식의 변화는 새로운 윤리적 감각을 생기시킨다. 육도 윤회하는 모든 생명체가 무아의 존재라는 자각은 윤회하는 유정들이 모두 한때의 ‘나’였고, ‘나’일 것이라는 지혜를 동반한다. 그래서 자아 중심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차별은 탈인간의 관점으로 변화한 사랑이 된다. 그러한 보살의 자비는 자기 중심성을 벗어난 지혜 그 자체이다. 또 육도 윤회하는 모든 생명체가 한때 ‘나’였고 ‘나’일 것이라는 관점은 현대 ‘자연생태’의 이론과 실천에 대해 탈인간 중심의 관점을 제공한다.
--- p.3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