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국제법 강의용 교과서를 집필할 것인가에 대하여 오랫동안 망설였다. 우선 은사가 학계에 활동하시는 동안에는 제자가 교과서를 출간한다는 것이 결례라고 생각하여 교수가 된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동안 교과서의 집필은 필자의 머릿 속 작업 목록에 담겨져 있지 않았었다. 2007년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필자가 국제법을 배운 기당 이한기, 석암 배재식 그리고 송현 백충현 선생까지 모두 돌아가시게 되자 무언중 심적 압박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이미 국내외적으로 정평 있는 국제법 교과서가 적지 않은데, 필자의 작업이 그저 그런 범작 하나를 추가하는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교과서는 좀 묘한 성격의 책이다. 훌륭한 교과서를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렵고 한없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아무리 대가의 책이라 하여도 허점이 없기가 어렵다. 반면 과감히 달려 들면 매우 쓰기 쉬운 책이 교과서라고도 한다. 새로운 학문분야에 관하여 최초의 교과서를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미 국내외적으로 정평 있는 교과서들이 여러 종 발간되어 있을 것이므로 그런 책들을 적당히 참고하여 작성하면 생각보다 적은 노력만으로도 얼추 외관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교과서류의 서적은 가장 빈번히 발간되기도 하나, 가장 손쉽게 잊혀지는 책이기도 하다. 명저의 반열에 오른 교과서는 학계에서 오랫동안 기억되고 인용된다. 그것이 학계의 일반적 동향을 표시하는 기준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과서는 학술적 업적으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독자의 매서운 눈총만 받는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의 집필은 일견 쉬운 것도 같지만,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수년 전부터 국제법 강의용 교과서를 집필하겠다고 생각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아무리 국제적으로 정평 있는 교과서라도 외국서적은 우리 대학의 기본 교재로 채택하기에는 적절치 않다. 우선 학생들의 영어 능력도 문제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 한국의 사례나 시각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제법은 국제적으로 공통인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외국의 저명한 책을 교과서로 사용하여도 무방하고, 영어 강의도 손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영어 교과서를 사용하여 영어로 강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지적은 법학의 다른 전공과 비교하면 부분적인 타당성이 없는 것도 아니나, 반드시 옳은 지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제법 강의라 하여 만국 공통의 내용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미국의 국제법 교과서를 보면 그 내용의 상당 부분에는 미국의 경험과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영국에서 발간된 국제법 교과서를 보면 역시 그 내용의 상당 부분에는 영국의 경험과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프랑스의 교과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제법 강의에 있어서도 “국적”은 무시될 수 없다.
한편 국내에서 발간된 기존의 국제법 교과서를 보면 훌륭한 저작도 여럿 있으나, 개론서로 사용하기에는 필자 나름대로 내용이나 분량, 형식 등에 있어서 불만이 없지 않았다. 근래 법학 전분야에서 교과서의 분량이 매우 늘어나고 있고, 국제법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법률관계 직업으로 진출하는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이 실무적으로 국제법적 사건에 직접 부딪치는 경우는 평생 몇 차례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학생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세세한 내용의 이론강의를 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왜 국제법적 지식이 필요한가에 대한 동기유발을 자극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수의 기존 교과서들은 한국에서 발간된 교과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제법적 경험이 충분히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고 생각되었다. 국제법 개설서가 외국의 사례만을 중심으로 내용을 설명하게 되면 학생들은 자칫 국제법이란 우리와는 상관없는 뜬구름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교과서 집필을 구상하면서 우선 어떠한 형식을 취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미국식 Cases & Materials 형식의 교과서는 사실 공부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는 결코 친절한 책이 아니다. 그래서 미국의 법과대학생들 역시 이론을 간이하게 정리한 형태의 책들을 별도로 사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는 영어로 된 각종 저작물, 판례, 자료 등이 워낙 풍부하여 이를 중심으로 미국식의 교과서를 훌륭하게 꾸밀 수 있지만, 우리는 형편이 전혀 다르다. 반면 이론 설명 위주의 전통적 형식의 영국이나 일본의 교과서의 형태를 따르면 필자의 작업 역시 기존의 국내 교과서와 별다른 차별성이 있을까 우려도 되었다. 그런 교과서를 강의실에서 사용하려면 강의자가 항상 별도로 수업자료를 준비하여야 한다.
이에 필자는 양자의 절충형 교과서를 만들어 보기로 하였다. 즉 이론 설명에 있어서는 기존의 국내 교과서보다 분량을 대폭 줄이는 대신, 그러한 이론이 구현되고 있는 판례나 법령과 같은 각종 자료를 같이 수록하기로 하였다. 다만 미국식의 Cases & Materials 형식의 교과서에는 논문의 발췌가 상당한 내용을 차지하나, 국내 학계의 실정상 논문이나 단행본의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미국식 교과서보다는 사례의 반영이 적고 이론의 설명이 많으나, 영국식 이론서보다는 이론 설명의 비중이 적고 사례의 반영이 많은 형식이다. 필자는 이러한 형식의 교과서를 국내외적으로 접하여 보지 못하였으며, 그야말로 필자 나름의 구상의 산물이다. 그러면서도 사례에 있어서는 한국의 판례, 법령, 외교적 경험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남들이 이 책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필자로서는 국내의 다른 어떤 국제법서보다 한국의 경험과 시각이 많이 반영된 점이라고 답할 것이다.
약 3년 전부터 필자는 외부로는 내색도 않고 이 책의 집필에 필요한 국내외 자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다른 급한 일들을 하면서 작업을 하다 보니, 이 책은 필자 작업의 우선순위에서는 종종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7년 여름 미국식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이라는 국내 법학교육의 일대 변화가 발표되었다. 2009년부터 첫 입학생을 받았고, 2010년부터는 필자도 법학전문대학원에서 국제법 강의를 하여야 한다. 이에 늦어도 2010년 벽두까지는 강의용 국제법 교과서의 간행을 마무리할 필요성이 커졌다. 이번에 급히 마무리하게는 되었지만 국제법 전반의 개설서로는 일부 내용이 추가되어야 함을 알고 있다. 미비한 항목들은 앞으로의 개정을 통하여 보완할 예정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 표방하는 바와 같이 국제법 전반에 관한 강의용 교재로 만들어졌다. 필자가 이 책을 집필하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적용하였다. 즉 조약문의 인용에 있어서는 한국이 당사국으로 공식 번역본이 있는 조약은 한글 번역본을 사용하고, 한국이 당사국이 아닌 조약은 영문을 사용하였다. 다만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조항은 공식 번역본이 있는 경우에도 영문을 사용한 경우도 있다. 국제판례는 영어 원문을 그대로 발췌하여 사용하였다. 국제판례는 그 결론요지만 간단히 공부하여서는 취지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원전을 직접 읽어야만 필요한 지식의 습득이 가능하다. 사실 외국의 교과서에서는 국제법적으로 중요한 판례라면 10-20쪽까지 수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한국의 실정을 감안하여 영어 원문이 최대 2쪽 분량은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으며, 다만 불가피하게 이 기준을 넘긴 판례도 몇 건 있다. 판례의 일부 발췌만으로는 독자가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매 판례의 앞 부분에는 전체 사안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을 붙여 놓았다. 판례의 선정에 있어서도 한국이 관련된 판례가 있는 경우 가급적 이를 수록하였다. 이론 설명에 있어서는 세부적인 내용에 관한 서술은 과감히 생략하는 대신, 제도의 배경과 의의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자세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항목별 설명의 뒷 부분에는 “검토”라는 표제하에 본문 내용과 관련되어 제기되는 법적 쟁점이나 독자들이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문제점들을 제시하였다. 비교적 간단한 연습문제 같은 질문도 있고,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아 뚜렷한 정답을 찾기 어려운 질문도 있다. 또한 추가적 설명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다. 반드시 정답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지 말고, 주변 동료와 토론 주제로 활용하기 바란다.
전체적으로 영어 지문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하여 독자의 입장에서는 언뜻 책을 집기에 부담감을 가질지 모르겠다. 따라서 영어에 자신이 없고 비교적 간이한 수준의 국제법 지식만이 필요한 독자라면 이 책의 국문 내용만 읽어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런 경우 600쪽 남짓의 국제법 교과서를 읽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법학전문대학원생 내지 본격적인 국제법 공부를 원하는 독자들은 전체를 모두 세세히 보기 바란다. 처음 읽을 때는 국문으로 된 부분만 일별하고, 나중에 영문자료까지 함께 독파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교과서를 발간하면서 국제법을 같이 공부하는 동학들과 독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할까 걱정과 기대가 앞선다. 앞으로의 개선을 위한 많은 질정을 바란다. 끝으로 이 책의 발간을 위하여 세세한 노력을 하여 주신 박영사 관계자 여러 분들께 감사드린다.
--- '머리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