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황자비가 지내고 있는 로제궁의 지하실 아래로 한 여인이 겁도 없이 작은 불빛 하나만을 밝힌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사이로 얼핏 스치는 여인의 실루엣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치 타는 듯한 불꽃을 연상시키듯 붉게 흩날리는 머리칼이 허리까지 부드럽게 쏟아져 흘렀고, 새하얀 얼굴에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와 단호하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어딘지 모르게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야말로 경국의 자태를 그대로 띠고 있는 신비한 여인. 그녀가 바로 마티디안 제국의 제3황자비이자, 마티디안의 속국인 아르반의 왕녀 시로벨 아가렛토 아르반이었다.
그녀는 동맹이란 이름 아래 마티디안에 보내졌고, ‘빙안의 귀공자’로 불릴 만큼 냉혹한 성품으로 유명한 제3황자의 아내가 되어야만 했다. 여리고 가냘픈 성품으로 제3황자의 차가움을 견디지 못하고 점점 지쳐 가고 있다는 소문과는 달리, 지하실로 내려가는 그녀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진지하고 단호해 보였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캄캄한 지하실 바닥이 보일 쯤, 시로벨은 떨리는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드래곤 형상의 구슬을 바닥으로 던졌다. 그러자 바닥으로 거대한 호수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시로벨은 긴 숨을 내쉬며 품 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있는 힘껏 추켜올렸다. 그러자 단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던 루비가 호수와 공명하기 시작하더니 이내 드래곤의 형상으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건국일부터 지금까지 아르반을 수호하는 드래곤이시여, 아르반의 마지막 왕녀 시로벨 아가렛토 아르반이 청합니다. 부디, 제 목소리에 응답하여 주소서!”
이내 그녀는 들고 있던 단검으로 과감히 자신의 심장을 향해 찔렀다. 지독한 통증과 더불어 입과 가슴에서 핏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엔 고통이 스며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토해낸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소용돌이 쪽으로 뻗어 나가자 그곳에서 서서히 빛이 나기 시작했다.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도 시로벨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서서히 빛이 잦아들며, 소용돌이는 사라지고 어느새 그 자리엔 한 사내가 나타나 싸늘해져 가는 시로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금빛과 흑빛이 뒤섞인 긴 머리칼에 서늘한 눈동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생명의 빛이 꺼져 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를 부르다니. 이번 아르반의 왕녀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그대는 곧 죽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도 날 부른 것이냐?”
“……알고, 있습니다, 반홀님.”
시로벨에게서 미약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대대로 아르반을 수호하였던 드래곤 반홀은 이렇게 제 목숨을 걸고서 자신을 소환한 왕족은 없었기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죽어가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일단 소환을 당했으니,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는 한 손을 들어 시로벨의 상처에서 피를 멎게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을 것이다. 자신을 부른 대가는 반드시 목숨이어야 했기에.
“그래. 이런 미친 짓을 해서까지 날 부른 이유를 말하라.”
그녀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선을 억지로 붙잡으며 반홀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그를 부른 이유. 어쩌면 이 때문에 큰 파란이 불어 닥칠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
“저와 같은 영혼을 지닌, 다른 세계의 저를 이곳으로 보내주십시오.”
“……뭐?”
“반드시, 반드시 그리해 주십시오. 그리해 주셔야 합니다. 아르반을 수호하는 드래곤이시여, 아르반을 위해서 반드시, 으윽!”
잠시 멈췄던 피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반홀은 도대체 이 왕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다른 세계에 같은 영혼을 지닌 자라니. 그걸 어찌 이 왕녀가 알고 있는 거지?
“부디, 부디!”
하지만 그걸 어찌 알았든, 그 이유는 상관치 않았다. 목숨을 걸고 자신을 소환했으니 자신도 그 목숨을 받고 그녀가 원하는 소원을 반드시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운명이 뒤바뀌고, 세상이 어긋나며, 자신이 도망자가 된다 할지라도.
“……알았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주지.”
시로벨은 그제야 엷은 미소를 띠며 마지막 숨을 삼키고선 잠이 들듯 눈을 감았다. 점점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정말 뜻밖에도, 자신의 남편이지만 단 한 번도 살갑게 대해본 적이 없는 남자, 카헤시온이었다. 정략결혼으로 만나 사는 동안 다정한 부부는 아니었으나 그가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고, 그 상처로 인해 그가 서서히 메말라 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의 상처까지 보듬어줄 만큼 여유가 있지도, 또한 강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운명을 뒤로 미룬 채, 이렇게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다른 나라면. 또 다른 시로벨이라면…….
‘어쩌면…… 그녀는 당신을 변하게 할지도 모르겠네요, 카헤시온.’
오늘은 자신이 태어난 날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날,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내가 이곳에서 또다시 시로벨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겠지. 부디, 제발 부디, 자신이 차마 따르지 못했던 운명을 제대로 이루어주길 바라며…….
(중략)
그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고,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를 발견했다. 무척이나 묘한 분위기의 남자였다. 황금빛과 흑빛이 뒤섞인 머리칼은 어떻게 저런 색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서늘하게 뻗은 눈매에서는 기묘한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뚫어지게 보지 마라. 닳는다.”
그,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저놈은 또 뭐야. 설마, 저승사자?
“너, 너 넌. 누구. 아니. 당신은 누구…… 세요?”
왠지 존댓말을 써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세상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까. 정말로 저승사자, 그런 걸지도. 그럼, 혹시라도. 아주 혹시라도 한 번만 봐달라고 빌면 살려주지 않을까? 내가 착한 짓 엄청 많이 했잖아. 지금 죽은 것도 저 나쁜 새끼 잡으려다 이렇게 된 거니까. 게다가 아직은 이대로 죽을 수 없었다. 이렇게 죽을 수 없다고!
“이름 한소휘. 형사로서 제법 성실하게 살았군.”
오오! 역시 어쩌면 정말 통할지도?
“그렇죠? 대한민국의 공무원으로서 정말 성실하게, 국민들의 치안을 위해 이 한 몸 다 바쳤죠. 오늘도 그러다가 이렇게……. 흑.”
소휘는 없는 눈물도 쥐어짜며 간절하게 저승사자일지도 모를 남자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다시 살지도 모르는데, 비는 게 아니라 기어서라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그러니까, 저 좀 살려주세요. 네? 저승사자님 맞죠? 그렇죠? 제가 이렇게 죽을 운명이 아니거든요. 제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대한민국의 안전도 책임져야 하고, 연애도 해봐야 하고, 결혼도 해봐야 하고, 노후엔 공무원 연금도 받아봐야 하는데. 이렇게 죽기엔 너무너무 억울한데.”
아, 연금 소리는 뺄 걸 그랬나?
“난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예?”
“하지만 널 살려줄 수는 있다.”
“정말요?”
살려줄 수도 있다는 소리에 소휘는 다시금 간절하게 그를 붙잡았다. 그래, 다 필요 없고 살려주겠다는 저 말이 중요한 거지!
“그래, 한소휘. 내가 널 살려주겠다. 네가 새로운 삶을, 또 다른 너의 운명을 살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절대로 이 은혜 평생 안 잊고 살겠습니다!”
남자가 소휘의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고, 그 손길에 따라 그녀의 눈꺼풀이 무겁게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몸이 무거워지고 정신이 희미해진다.
소휘는 몽롱한 의식 속에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뭐, 그게 뭐가 중요해. 다시 살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역시 세상 착하게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리고 아직은 내가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다 하지 못했으니까.
그렇게 소휘의 영혼이 그의 손길에 완전히 잠들어 버렸다. 하지만 그는 그 영혼을 눈앞에 보이는 소휘의 육체에 넣어주지 않았다. 분명 살려는 줄 것이다.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녀의 죽음을 앞당긴 것이니까.
그녀는 전혀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몸으로 새로운 운명을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같다고 할 수도 있다. 한소휘, 그녀는 시로벨 아가렛토 아르반과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지만 같은 영혼을 지닌 존재니까.
“하지만 신기하군. 죽음을 앞당기긴 했지만, 이 여자의 생도 그리 오래 남진 않았어. 오히려 이세계로 오면서 생이 연장되었군.”
서로 다른 세계에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게 되었다라.
반홀은 여전히 시로벨 그녀가 어떻게 또 다른 세계의 자신의 존재를 아는지, 또 왜 이러한 소원을 목숨을 걸면서까지 빌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게 완전히 잘못된 일이 아닌 것 같다는 묘한 생각이 들었다. 분명 운명을 바꾸고 어긋나게 하는, 이 모든 것이 금지되어 있는 일인데도. 그로 인해 이제부터 자신은 씻을 수 없는 죄를 행한 죄인이 되었어도.
“처음부터 이렇게 흘러갈 운명이었을지도. 그러니 이왕 벌어진 일, 왕녀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중략)
머릿속이 아득했다. 누군가 자꾸 자신을 부르는 것 같기는 한데,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대답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기가 어려웠다. 마치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졌다가 다시 붙은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묘한 감각이 곤두서고, 전혀 알 수 없는 기운이 휘몰아치는 듯, 아무튼 기분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그러다 문득, 까만 무언가가 일렁이면서 그 사이로 낯이 익은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누군지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굉장한 미인인 것 같았다.
저런 사람을 내가 알 리가 없는데. 대체 왜 이렇게 낯이 익은 느낌이 드는 걸까? 너무 친숙한 기분에 오히려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때,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그 눈동자가 살포시 휘어지면서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하고, 고마워요.’
그 목소리가 순식간에 커다란 울림이 되어 숨이 막힐 정도로 온몸을 눌러왔다. 동시에 그토록 떨어지지 않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리면서 그 모든 잔상들이 삽시간에 사라져 버렸다.
“으윽!”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내며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이처럼 생생한 꿈은 처음이었다. 아니, 정말 꿈이 맞긴 한 거야? 대체 무슨 그런 거지같은 꿈이 다 있어. 하긴, 죽다 살아나는 거니까 당연한 건가? 아니, 내가 정말 살긴 산 건가?
그녀는 그제야 제대로 숨통이 트인 걸 확인하며 가쁜 숨을 마저 내쉬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뭣 같은 기분은 정말 처음이었다.
“백곰, 그 개자식만 아니었어도.”
소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두통을 좀 진정시키려다 자꾸만 손가락에 걸려드는 머리카락에 미간을 찡그렸다. 머리카락이 언제 이렇게 길어졌지? 형사 노릇 하면서 거추장스러운 건 딱 질색이라 항상 숏커트의 스타일만 고집해서 이렇게 머리가 길 리가 없는데.
자꾸만 손가락에 걸리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쥐고서 아래로 내린 순간, 소휘는 비명을 질렀다.
“……하? 하? 악!”
내, 내 머리가 왜 이래. 왜 이렇게 길고 시뻘건 색깔로 변해 있는 거냐고!
그녀는 절로 튀어나올 것 같은 욕을 억지로 삼키고서 일단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있는 곳이 굉장히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요즘 이런 병원도 다 있나? 정석이, 이 자식은 대체 날 어디로 데려온 거야! 내 월급이 쥐꼬리인 건 저도 다 알면서!
소휘는 이유를 알 수 없이 불안한 마음에 괜한 곳에 분풀이를 하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역시 얼굴 한 번 보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화려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런 생각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순간, 소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완전히 굳어버렸다. 거울 속에 전혀 모르는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전혀 모르는 여자가!
결코 자신의 것일 리 없는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허리 아래로 치렁치렁 쏟아져 내렸다. 밥 먹듯 하는 야근에 상할 대로 상하고 다크서클까지 진한 피부는 어디로 가고 어디 화장품 광고 CG에서나 볼 법한 투명하고도 새하얀 피부가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대한민국 사람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암갈색 눈동자 대신 맑은 물빛 눈동자가 이 어이없는 상황에서 연신 빠르게 깜빡였다. 게다가 온갖 운동으로 다져진 단단한 몸이 아닌, 한 대 치면 툭 부러질 것 같은 팔다리까지.
대체 저 여자는 누구야. 저게 나야? 말이 돼? 이게 말이 되냐고!
“꿈이야. 꿈이 아니면 이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할 건데? 응? 꿈이니까, 깨야 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런 황당한 꿈은 깨야 한다고!”
소휘는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거추장스럽게 긴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머리카락을 쥐어뜯을수록 두통이 심해졌다.
요즘은 꿈에서도 아픔이 느껴지나? 아니잖아. 그럼 이게 현실이라는 건데. 그건 더 말이 안 되잖아!
“……그러고 보니, 그 저승사자.”
분명 뭐라고 속삭였었다. 눈이 감기고 정신이 멍해져서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분명 뭐라고 말을 했었다. 설마 이 거지 같은 상황에 대해서 말한 거였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거야? 대체 왜? 왜? 아무리 세상사 공짜는 없다지만, 저승사자가 이러면 안 되잖아!
“아오, 그 빌어먹을 자식!”
소휘는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이 상황이 이해되질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옷을 입고 있는지 보고서는 허탈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매번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고 다닌다고 여자가 아니라는 소리만 골백번도 더 들었는데, 지금 입은 옷은…… 아예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잔뜩 달린 새하얀 드레스였다.
“하,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네.”
소휘는 자꾸만 앞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리며 연신 그 뭐 같은 저승사자를 향한 살벌한 말을 곱씹었다. 그러던 와중, 문밖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전하, 약을 드실 시각이십니다.”
그 순간, 소휘의 얼굴이 더욱 제대로 일그러졌다. 대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지? 소휘는 그녀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선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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