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가씨가 돌았나! 미쳤어요?”
접촉사고도, 대형사고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멀쩡하고 착하게 잘 세워져 있는 마이카 옆에서 그 아저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중략)
주유소 직원의 실수였는지 기름통 하나가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아서 휘발유가 줄줄 새며 트렁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럴 땐 닦든가, 뚜껑을 닫아버리든가, 얼른 해결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앗, 휘발유가 새고 있잖아! 어서 빨리 수습해!’라고 머리에서 울리는 경고에 신경 쓸 새도 없이, 이미 내 몸은 전원이 들어와 있을 카메라로 달려간 지 오래였다.
지금, 이 죽여주는 석양에, 1시간에 한 번만 볼 수 있는 기차까지 지나가고 있는데! 내가 그토록 원했던 뮤직비디오를 찍겠다고 판까지 벌여놓은 마당에, 트렁크에 그까짓 휘발유 한 통이 엎질러진 사건 따위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나중에 처리해도 되는 아주 사소한 문제일 뿐이었다.
(중략)
그게 문제였다. 미쳐 날뛰며 뮤직비디오를 찍느라 처리하지 못한 휘발유 한 통. 그 휘발유가 졸업작품을 찍었던 겨울을 지나 봄, 여름이 되는 동안 차 속으로 스며들어 부품들을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펑크 난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출동한 긴급구조요원은 트렁크를 열어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미쳤냐고, 부품들이 다 녹아가고 있는데다 하마터면 차가 폭발할 수도 있었다고. ‘당신 죽을 뻔했다’며 혀를 찼다. --- p.8, ‘프롤로그’ 중에서
프롬프터를 읽어 내려가는 정재용은, 뭐랄까, 예상했던 바이긴 하지만 아무튼 MC답지 않았다. 어눌한 말투, 느릿느릿한 톤. 그러나 김종민 작가와 나는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어눌함과 어색함이 우리 프로그램의 특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정재용은 처음 같지 않게 ‘막무가내 대본’을 잘 소화했고, 우리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짚어냈으며, 강도가 세다고 생각되는 멘트도 서슴없이 팍팍 날려주었다.
그렇게 첫 녹화를 끝내고 우리들은 완전히 탈진한 채로 칡냉면을 먹으면서 얘기했다.
“왠지 뭔가 될 거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는 모르겠네? 근데 이게 정말,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까?”
지금도 새로운 프로그램의 첫 녹화를 끝낼 때마다, 여전히 그런 느낌이 든다. 이게 과연 프로그램이 될 수 있을지, 아리까리한 기분. --- p.127, ‘단돈 5만 8천 원으로 제작한 DIY 세트’ 중에서
잘하는 것을 찾기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하고, 열심히 살기보다는 즐겁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꼭 1등, 성공, 승리,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교육에 사로잡혀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미리 걱정하거나 실패할 것을 상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직업을 찾지 말고, 꿈을 따라갔으면 좋겠다. 나는 꿈이라는 것이 어떤 ‘목표’나 ‘최종 목적지’가 아닌, ‘생각만 해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체조 선수가 되겠어.”는 꿈이 아니라 ‘목표’ 내지는 ‘미래 계획’이고, “어찌되었든 체조를 하고 싶어.”가 꿈이라고 생각한다. “국내 최고의 인권 변호사가 될 테야.”가 꿈이 아니라 “인권을 위해 변호하는 일을 할 거야.”가 꿈이라고 생각한다.
‘꿈을 따라서 살기가 힘든 세상’이 아니라, ‘꿈을 따르지 않고 살기에는 험한 세상’이다. 꿈을 포기하고, 직업과 목표를 찾기 위해 미래의 계획을 세워서 사는 경우, 만약 인생이 그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회사에서 짤리고, 금메달을 못 따고, 최고가 되지 못한다면), 결국 자신에게 남는 것은? 꿈을 따라서 그냥 좋아하는 일을 하길. 실제로 미칠 만큼 좋아하면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은 성공도 하게 되어 있다. --- p.95, ‘남들과 보조 맞춰 사는 건 아니라고 봐요’ 중에서
누가 뭐래도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남보다 잘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거? 분명히 있다. 아마도 모두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저 무조건 노력하고 극복해서 정상에 오르려고만 할 게 아니라, 그래도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잘할 수 있는 일, 내가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 일을 먼저 찾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닐까? 체념을 통해 얻는 나의 결론.
“포기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다.”
물론 포기해도 되는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긴 하다. 아무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최고가 되라고 자신에게 강요하면서 살지는 말자는 거다. 만약 어떤 일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면, 그리고 그게 행복하다면 그냥 B- 정도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 p.76, ‘'행복한 B-'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중에서
좋은 선배 PD들 밑에서 경험을 많이 쌓으면, PD로 성장하는 데 당연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보고 배운 대로만 똑같이 따라 하게 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방식대로 일하는 게 몸에 배어서, 비슷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그저 그런 PD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를 이끌어준 사수가 한 명뿐이었고, 조연출로 거쳤던 프로그램도 많지 않았다. 다시 말해 배운 게 별로 없어놔서 남들이 하는 방식대로 할 줄을 몰랐다. 이런 걸 방송으로 내보내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애당초 몰랐으니,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 거리낄 게 없었던 것.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게다가 뭐 하나라도 남들과 비슷하게 하는 걸 원체 못 견디는 성격이라‘내 식대로 저지르기’를 일삼다 보니, 운 좋게 대중의 바람과 맞아떨어져서 ‘재용이의 순결한 19’ 같은 작품을 만들게 된 것 같다. --- p.100, ‘똥줄 타들어갔던 입봉 스토리’ 중에서
나는 당장 죽게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물론 정해진 길, 대다수가 선택한 안전한 길로 가는 인생보다는 굉장히 수고스러운 인생을 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칼집을 많이 낸 문어조림이 훨씬 맛있더라. 순간순간을 많은 경험과 실패, 그리고 상처로 얼룩지게 만들고 싶다. 그렇게 농후한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에 집착한다.
지금 하고 싶은 것, 지금 먹고 싶은 것, 지금 느끼고 싶은 것을 충실히 따르며 살고 있다. 그렇게 살아온 나의 인생은 다행이도 아직까지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다. 허접하고 난잡하고 즉흥적으로 살면서 수많은 삽질을 해왔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 어떤 실수도, 큰 잘못도, 내가 숨 쉬고 살아가는 일에 크게 지장을 주지는 않았다.
--- p.293,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