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간밤에 자신이 어디에서 잠들었는지 생각했다.
몹시 피곤했기 때문에 맑게 생각하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눈앞에 잠들어 있는 미남이 누구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떠올려야만 할 터였다.
새까맣고 가는 머리칼, 그 사이로 달처럼 드러난 상아색 이마. 선이 아름답고 굳게 감긴 눈에 붉은 입술. 미남이다. 그것도 낯선 미남이었다.
맹세컨대 그녀는 지금까지 충동적으로 모르는 남자와 잠자리에 든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이 모르는 미남이라면 어떠한 종류든지 설명할 길이 있을 터였다. 그녀는 몽롱하게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고 확신했다.
그녀는 분명, 간밤에 언제나처럼 자신의 방 침대에서 홀로 잠들었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꿈일 것이다. 미남이 나오니 일단 길몽일 테고 더 발전시켜 보면 아침에 눈을 떴는데 침대에 미남이 선물처럼 누워 있는 꿈이다. 이 무슨 여자의 로망일까. 일어나서 춤이라도 춰야 하나.
미남의 숨결은 꿈치고는 아주 리얼리티가 있었다. 모처럼의 기회이기도 하고 아주 몽롱하기도 해서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이라기엔 성숙해 보인다. 삼십대쯤 되었을까. 곧고 끄트머리가 말끔한 눈썹도 날렵한 콧날도 대단히 완벽했다. 그가 덮고 있는 이불은 꿈답게, 그녀가 본 적 없는 화려한 것이었다. 이불 바깥으로 조각처럼 드러난 목 또한 완벽했다.
꿈이 전부 이렇다면 좋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누워 있는 침대가 제 것이 아닐뿐더러 남자의 뒤로 보이는 방 또한 낯설다는 것을 그즈음 알았다. 그러나 미남이 자고 있으므로 상관없을 것이다. 이대로, 이대로. 계속 누워 있을 수 있다면.
편안하고 피로하고 기분이 좋았으므로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고 숨 쉬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미남은 숨을 문득 들이켜며 눈을 천천히 떴다. 그의 눈은 그늘 아래서 밤하늘 같은 파란색이었다. 그녀는 꿈속의 남자라면 어떤 말을 할지 멍하니 상상했다. 그는 시선을 그녀에게 맞추었다.
잠시 후, 그녀는 목을 감아오는 무거운 압박감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이것이 꿈이라면 악몽이라는 것을 알았다. 남자는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 듯 생생하고 신중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드러난 어깨는 억세고 두터웠다. 그리고 그의 손아귀 또한, 그녀의 목을 틀어쥐고 있지만 않았다면, 훌륭하고 남자다운 손이라고 순수하게 칭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꿈인데도 어지럽다. 이제 깨고 싶어졌다. 두렵다. 그녀가 힘들어 그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는데 그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
그러니까, 말을 한 것은 같았으나 그것은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일단 한국어는 확실히 아니고, 영어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그가 목을 더 세게 쥘까 진심으로 두려워, 침도 삼키지 못하고 억지로 속삭여 물었다.
“누구세요?”
그러나 제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는 오한과 함께 깨달았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루젤은 자신이 제압한 여자를 내려다보며 엷게 인상을 썼다.
“누구냐.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반복한 질문에 여자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대답을 한다 해도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여자가 방금 한 말은 그가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얀츠도 부신어도 아니다. 실은 팔다리를 드러낸 저 복장부터가 낯설었다. 그는 결국 여자를 눈으로 감시하며 소리 높여 외쳤다.
“헤링어!”
아침 일찍부터 침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충실한 보좌관은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
헤링어의 느긋한 목소리는 눈앞의 광경에 막혔다. 루젤은 여자의 양손을 잡아 그녀의 머리 위로 눌러 제압하고 헤링어를 보았다. 보좌관의 저 얼굴을 보니 그가 들여보낸 여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여자는 제 목을 누르고 있던 손이 떨어지자 괴로운 듯 기침했지만 반항은 하지 않았다.
막 눈을 떴을 때는 놀라서 미처 몰랐지만 이제 와서 보니 여자는 손에 굳은살이 없고 팔다리가 모두 가늘었다. 암살자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신체 조건이었다. 그러나 그의 침실에, 대체 모르는 여자가 무슨 수로 침입해 들어왔다는 말인가?
헤링어는 매우 이상하고 심각한 얼굴로 주인을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주인님?”
“나도 모른다. 그걸 묻기 위해 널 부른 거다.”
헤링어가 모른다면 더욱 수상했다. 루젤은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말해라. 너는 누구냐.”
여자는 기침하며 눈물 고인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루젤은 헤링어에게 설명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이 여자가 내 옆에 누워 있었다.”
비단 지금이 전시가 아니라 해도 그가 잠드는 곳은 언제나 헤링어가 돌보고 있었다. 모르는 여자가 들어와 있는 것은 이상할 뿐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헤링어가 침대 옆으로 다가오자 루젤은 여자를 놓고 몸을 비켜 보좌관이 이 수상한 정황을 살필 수 있도록 했다. 헤링어는 여자가 누운 채 굳어 있자 미소를 지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레이디.”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의 손이니 발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의 상체를 솜씨 좋게 침대에서 일으키더니 셔츠를 위로 잡아당겼다. 루젤은 눈을 돌렸고 여자는 외마디 가는 신음 같은 소리를 냈다. 헤링어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자를 이리저리 살펴본 뒤 주인에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각하지 않았다.
“암살자나 기사는 아닙니다. 노예의 낙인이 없고 일한 흔적도 없으니 귀한 신분의 아가씨인 듯합니다.”
그러므로 헤링어는 여자가 낯선 남자들 앞에서 적절한 차림을 할 수 있도록 했을 터였다. 루젤은 여자를 다시 보고 그녀가 그새 헤링어의 망토를 두르고 있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헤링어는 침대 아래 천연덕스럽게 무릎 꿇고 사죄했다.
“레이디께 본의 아니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시절이 수상하여 꼭 필요한 절차를 밟은 것이니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길.”
여자는 헤링어와 루젤을 번갈아가며 보았다. 루젤은 침대에서 내려서 두 손을 들어 그녀에게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여자는 그러나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루젤은 헤링어를 보았다. 그 자신은 언제나 이런 경우가 거북하고 어려웠던 것이다. 헤링어는 여자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이곳에 레이디께 해를 끼치는 것은 없으니 부디 안심하시길. 레이디께서 어느 땅의 기쁨이신지 말씀해 주신다면 보호자께 모시겠습니다.”
헤링어의 말주변은 대부분의 여자에게 잘 통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루젤은 헤링어에게 귀띔했다.
“외국인이신 것 같아. 모르는 말을 쓰시던데.”
“그렇습니까?”
하긴 생김새도 묘하게 특이한 편이다. 균형이 잡힌 얼굴이고 피부가 깨끗해 미인이기는 했으나. 헤링어는 곧 미소를 띠고 몇 가지 언어로 번갈아가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어느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점점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아룰라어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마침내 약간 난처한 얼굴로 헤링어는 주인을 보았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 레이디는 제가 할 줄 아는 말은 하지 않으시는 모양입니다.”
박식한 헤링어에게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리고 신분 높은 아가씨가 아룰라어를 모른다니 이상한 일이다. 책 읽기를 싫어했던 그조차 아룰라어는 귀족의 소양으로 공부했다.
루젤은 인상을 썼다.
“자네가 모르는 말도 있었나?”
“제가 모르는 것이야 하늘의 별처럼 많지요. 저를 과대평가하셨습니다.”
곤란하게 되었다. 이 여자가 차라리 하녀나 노예 같은 신분이었으면 모르되.
“그러면 이 레이디를 누구에게 보내고, 이 방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어찌 안단 말이냐?”
헤링어는 주인을 향해 건방지게 어깨를 으쓱했다.
“꼭 아가씨 본인에게 여쭈어야만 하는 일은 아니지요. 이곳 성주의 먼 친척이라도 되는 아가씨가 아니겠습니까.”
성주의 친딸은 이미 어제저녁에 보았다. 이런 아가씨는 소개받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럴싸한 가설이었다. 미혼의 유능한 장군을 노리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었다. 성주라면 자기가 내준 이 방에 어떤 비밀 통로가 있는지도 알고 있을 테고.
“부주의한 자로군.”
이런 일을 아주 처음 당한 것은 아니었으나 불쾌했다. 루젤은 전시에 이동 중인 장군에게 이런 짓을 하는 멍청이가 있다는 것에 인상을 썼다. 헤링어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밀 통로가 있는 방을 주는 바보는 하나도 너무 많은데 말이지요.”
이 여자야 무해해 보이니 그렇다 치지만 조금이라도 불순한 마음을 품은 종자가 그 통로를 이용했으면 어쩔 뻔했나. 물론 장군의 침소에 허가받지 않은 이를 들여보낸 시점에서 군법으로 처리해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레이디를 겁먹게 하셨습니까?”
헤링어는 이미 처음부터 여자의 목에 생긴 손자국의 깊이를 보았을 터인데도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루젤은 헛기침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물론 이번 사죄에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루젤을 조금 흘끔거리다 이불을 당겨 자기 목까지 가렸다. 헤링어가 혀를 찼다.
“당연히 놀라셨겠지요.”
“조르지는 않았다.”
“연약한 레이디는 주인님의 손만 닿아도 숨쉬기 힘들지요. 제국 최고의 기사이시니.”
“첩자라고 생각했다.”
“가여운 아가씨로군요. 주인님께는 봉변을 당하고, 목적을 못 이룬 성주에게도 혼이 날 테니까요.”
루젤은 불편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았다. 이 아가씨는 단순히 자신을 막 다루는 친척 어른에게 복종했을 뿐일 것이다.
헤링어는 주인에게 씩 웃어 보였다.
“우선 레이디를 시녀들에게 맡기고, 성주와는 천천히 이야기해 보지요.”
아침 식사가 차려진 홀에는 이미 성주의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주의 가문은 옛날에는 이 부근의 유지로 영향력이 컸다고 하나, 삼 대 전에 이미 도박 빚으로 성 이외의 모든 재산을 인근에 넘겨 이제는 귀족의 칭호도 이름뿐이었다. 남작이라 해도 바이언트 가문 출신인 데다 태자의 신임을 받고 있는 루젤에게는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성주의 가족들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일어서서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라이헤르타 남작님.”
루젤은 일단 고개를 숙여 자신도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젤이 앉아야 하는 자리는 분명했다. 그는 성주의 빈 옆자리로 가 앉았다. 하인이 바로 구운 빵을 날라 왔다. 성주 부인이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네요, 바이언트 경.”
“잠자리는 편안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문제는 아침이었다. 그는 그들이 한 일이 매우 불쾌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인상을 약간 썼다. 그러나 그 표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성주 부인은 순전하게 기쁜 얼굴이었다.
“부족하나마 나라의 큰일에 힘을 보탤 수 있어서 기쁠 따름이랍니다. 식사로는 어떤 걸 좋아하시나요?”
“충분히 맛있어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식탁에 있는 수프와 빵은 이미 푸짐해 보였고 그가 일어날 시간에 맞춘 듯 뜨거웠다. 그는 항의를 하려면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니라면 다른 화제에 이끌려 가게 될 것이었고, 그는 본인이 말주변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성주님.”
루젤의 진지한 부름에 성주는 사람 좋게 웃었다.
“예, 경.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전시에 군인이 머무는 장소는 비밀 통로가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 저도 압니다.”
성주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루젤은 기어코 인상을 쓰고 말았다. 표정 변화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라도 불편해진 심기는 보인 모양이었다. 성주 부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제 보좌관의 검사를 받지 않은 이가 마음대로 저에게 올 수도 없습니다.”
“예, 그것도 알지요.”
성주는 이번에는 좀 의아해 보였다. 루젤은 설마, 하고 물었다.
“혹시 검은 머리를 한 아가씨를 보내신 게 아닙니까?”
여러 가지 부연이 빠져 있는 말이었다. 식탁은 침묵에 싸였다. 성주와 성주 부인, 그리고 성주의 딸 모두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성주는 부인과 딸에게 우선 눈짓으로 확인한 뒤 루젤을 보고 심각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 성에는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만.”
물론 루젤과 그 휘하 병사들을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루젤은 가능성 높고 그럴듯했던 가설이 무너져 눈을 깜박였다. 주인의 뒤에 서서 시중들 대기를 하던 헤링어가 입을 열었다. 그도 기사의 후손이었으므로 이 정도의 대화에 끼는 것은 무례한 일이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성주님. 제가 몇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 뭐든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성주 가족은 모두 헤링어를 보았다. 헤링어는 루젤보다 훨씬 매끄러운 말솜씨로 설명했다.
“오늘 아침 제가 주인님의 침실에 들어가 보니 주인님도 언제 그곳에 들어갔는지 모르시는 검은 머리 아가씨가 있더군요. 보아하니 귀한 댁의 영애이신 것 같아 성주님의 친척이 길이라도 잃고 주인님의 방으로 잘못 들어가신 게 아닌가 했습니다만.”
‘당신이 억지로 혼사의 핑곗거리를 만들려고 한 것 아니냐’는 불평은 뻔뻔한 핑계로 대체되었다. 아가씨의 명예를 위한 것이었다. 루젤은 혼인할 생각이 없는 아가씨이니, 괜히 불명예가 남게 되는 것도 미안하고.
성주는 점점 더 이상한 얼굴을 했다.
“내 피보호자는 여기 내 딸밖에 없네만. 그것 참 이상한 이야긴데. 마을에도 검은 머리 아가씨는 몇 없고.”
“귀한 아가씨인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이 일대에 없네. 혹시 병사들이 데려온 여자분인 건 아닌가?”
헤링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별일이다. 이쪽이 먼저 아가씨가 침실로 멋대로 들어온 것에 대한 핑계를 제공했으니, 성주가 그 아가씨와의 관계를 저렇게까지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루젤과 헤링어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성주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희 하녀들이 오늘 아침 라이헤르타 남작님의 침실에서 검은 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데려다 씻기고 옷을 드렸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그 이야기를 하시는 건가요?”
바로 그거다. 루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는 당연히 성주님의 친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주의 가족들은 루젤이 어떤 오해를 했는지 알겠다는 얼굴이었다. 성주는 인상을 썼다.
“이것 참.”
“하시면 성주님께서는 모르시는 아가씨가 확실한지요?”
헤링어가 확인했다.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하네. 여보, 당신도 모르지요?”
“예, 여보. 하녀들도 이 일대에서 그런 아가씨는 처음 보았다고 하던데요.”
그럼 대체 그 아가씨는 어디서 나타나서 어떻게 그의 침실로 들어와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분명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계속 잠든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떠올리니 민망하기도 하고 더욱 수상했다. 루젤은 헤링어를 계속 보았다.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보좌관을 보고 있으면 답이 나오곤 했던 습관에 의한 것이었다. 헤링어는 턱을 쓰다듬었다.
“주인님의 문 앞은 밤새 병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새벽부터는 제가 같이 지켰습니다.”
“드린 방에는 분명히 비밀 통로가 없습니다.”
성주가 지지 않고 말했다. 잠시 눈치를 보던 성주의 부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가씨는 뭐라고 하던가요? 우리 친척이라고 하던가요?”
루젤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실은 말이 통하지 않아 제대로 여쭙지 못했습니다.”
성주의 딸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외국인인가요? 어느 나라 분인가요?”
“그것도 모르겠습니다. 여기 헤링어가 모르는 말을 쓰더군요.”
“어머나…….”
이래서야 도저히 설명이 안 된다. 외국인이고, 귀한 집의 딸이, 들어갈 방법이 없었던 방에 들어와 해괴한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있었다는 건 어떻게 된 일일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나.
루젤은 이마를 짚었다. 헤링어는 병사를 하나 불러 이런저런 지시를 내렸다.
똑똑.
충분히 각오하고 두드린 것이었지만, 정작 소리가 귀에 와 닿고 나니 문을 두드린 것이 대단히 무모한 일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루젤은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골치가 아팠다. 차라리 다섯 명의 적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들어가시지요.”
문 앞에 서 있던 병사가 적당히 시간이 지난 뒤 문을 열고 공손하게 손짓했다. 방 안이 한눈에 들어왔다.
성주의 부인이 임시로 내준 방은 원래 이 대 이전에 시집가지 않은 아가씨 중 한 명이 쓰던 방이었는데 그녀가 결혼하고 나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모양이었다. 이 성의 구체적인 사정은 알 바가 아니었으나 그 방은 충분히 크고 안락해 보였으며 필요한 가구가 있었다. 침대에 새로 채운 풀과 협탁에 올린 꽃의 향기가 먼지 냄새를 눌렀다.
노란 호박단을 장식으로 단 침대에, 아침의 여자는 앉아 있었다. 아침에 보았을 때 그녀가 입고 있던 옷은 팔과 다리가 모두 드러나는 짧은 셔츠와 바지로 도무지 귀한 집의 아가씨가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으며 보기에 민망했다. 다행히 그녀는 이제 붉은색의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 드레스는 그가 보기에 점잖았고 그녀에게 약간 크고 짧아 맞지 않는다는 것만이 어쩔 수 없는 단점이었다. 그녀의 목에는 수건이 감겨 있었다.
시중을 들던 하녀가 루젤에게 절했다. 침대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헤링어가 일어나 주인을 맞았다.
“오셨습니까, 주인님.”
여자는 루젤을 보자마자 창백하게 질렸다. 그럴 만도 하지만,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두려움을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헤링어는 빙긋 웃었다. 루젤의 등 뒤로 병사가 문을 닫았다.
“주인님을 이렇게 싫어하는 숙녀분은 처음이시지요?”
“전장에서 날 죽이려 드는 여성 장수나 여성 암살자는 많았다.”
“하지만 이분과 같이 얌전한 숙녀분들은 적국에 사는 분이건 아니건 간에 하나같이 주인님께 호의를 품고 있으니까요.”
난처하다. 루젤은 침대로 다가가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침대는 문에서 가장 먼 창가에 딱 붙어 있었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문 앞에 선 채로 물었다.
“뭐 좀 알아낸 게 있나?”
‘이분과 같이 얌전한’으로 보아 헤링어는 여자가 무기를 드는 사람은 아니라고 확신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 판단을 존중하면 될 것이다. 헤링어는 여자에게 다정한 얼굴로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레이디. 주인님은 나쁜 분이 아닙니다.”
“알아듣던가?”
여자는 루젤을 흘끔거리며 헤링어에게 풀 죽은 얼굴을 보였다. 헤링어는 주인을 보고 또 웃었다.
“제가 아는 말 중에는 전혀 통하는 것이 없다는 걸 다시 확인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슈자니즈로 필담을 시도해 봤는데 그것도 안 통하더군요. 아룰라어도 아예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루젤은 당황했다. 아룰라어를 전혀 모르는 귀족은 없다. 옛 아룰라어로 된 속담이 어디에나 생활 깊숙이 남아 있는데.
“그럴 수가 있나?”
“사실 입고 계시던 옷의 재질도 제가 본 적 없는 것입니다. 하녀들도 그런 것은 본 적이 없다고 하는데, 색은 좋지 않으나 염색이 깔끔하고 두께가 일정한 좋은 물건이었습니다. 목욕을 시킨 하녀들의 말을 들어봐도 일을 한 흔적은 없고 오히려 잘 관리된 피부라고 하니 어딘가의 유서 깊은 귀족가의 영애이시거나 대단히 부유한 분이리라 생각됩니다만.”
“그런데도 아룰라어를 못 하신다고?”
이상한 일이었다. 여자는 루젤을 흘끔거리는 것을 멈추고 헤링어를 빤히 보았다. 헤링어는 여자에게 부드럽게 또 말했다.
“괜찮으니 안심하십시오.”
여자는 좀 안심한 얼굴이었다. 루젤은 헤링어에게 확인했다.
“지금은 좀 안심하신 것 같다만.”
“목소리와 어조로 안심하신 거지요. 눈치가 빠른 분 같습니다.”
난감하다. 루젤은 여자가 이불을 당겨 자기 눈 아래를 전부 두르자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 통해야 사죄를 다시 할 터인데.”
“주인님의 입장에서는 정당행위시지 않았습니까.”
“그렇다 해도 연약한 레이디의 목을 틀어쥐었으니 겁먹으실 만하다. 그리고 말이 통해야 어떻게 내 방에 들어오셨는지도 여쭐 텐데.”
사실 후자가 문제였다. 헤링어는 하녀에게 말했다.
“나가 있어라. 필요하면 부를 테니.”
하녀는 얌전히 절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루젤은 문 앞에 계속 서 있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줄을 몰라 그대로 있었다. 헤링어는 여자 보란 듯이 루젤을 가리키고 또박또박 말했다.
“라이헤르타 남작님.”
여자는 한 번 미간을 좁혔다.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헤링어는 반복했다.
“라이헤르타 남작님.”
여자는 이불을 가슴까지 내리고는 인상을 쓴 채로 따라 했다. 그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라이헤르타 남작님?”
“잘하셨습니다.”
헤링어는 상대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칭찬을 하며 손뼉 쳤다. 여자는 헤링어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여자는 허리까지 오는 검은색의 머리칼과 대단히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미소에 루젤은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 헤링어는 제 주인을 보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실 겁니다.”
“이름인 줄이야 아시겠지.”
“어쩌면 신분을 뜻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주인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혹은 신경 거스르지 말라, 라는 뜻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지요.”
“헤링어.”
루젤은 한숨을 쉬며 보좌관의 이름을 불렀다. 보좌관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아무튼 아가씨의 얼굴을 보려고 여기까지 오신 것은 아니잖습니까. 가까이 오시지요, 주인님.”
“레이디가 두려워하시니…….”
“먼 곳에서 멀뚱히 서 계시는 것도 아가씨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우실 겁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루젤은 아가씨에게 가볍게 절하고 천천히 다가갔다. 여자는 그가 다가올수록 겁먹은 얼굴을 했지만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지는 않았다. 사실 도망가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헤링어는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밀어서 루젤이 앉을 수 있도록 했다.
루젤은 의자에 앉아서 여자의 눈을 보았다. 여자는 시선을 돌렸다. 그는 당황스럽고 미안하기도 했지만 약간은 부아가 치밀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처음부터 수상한 방식으로 다가온 것은 그쪽이다.
“루젤 바이언트입니다.”
그는 우선 이름과 가문을 소개했다. 여자는 그를 다시 흘끔 보았다. 그녀의 눈은 정말로, 정말로 검어 안이 전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선이 어쩐지 충격을 주었다. 그는 갑자기 고이기 시작한 침을 삼켰다. 여자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힘들다.
“아침엔 놀라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성함은 유나라고 하신답니다.”
헤링어가 귀띔했다. 그렇다면 통성명은 가능했던 것이다. 여자는 여전히 겁먹은 눈치였지만 루젤과 눈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루젤은 가만히 물었다.
“레이디 유나, 이렇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정확히 어떤 집안 출신인지 모르니 이렇게 부르면 될 것이다. 유나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지만 루젤은 그냥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레이디 유나, 놀라시게 한 것은 제 불찰이오나, 저 또한 몹시 놀랐다는 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유나는 눈을 깜박였다. 그는 돌에 대고 말하면 이런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나쁘다. 돌은 그에게 겁먹은 얼굴이나 경계하는 눈빛은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 또한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혹시 돌을 겁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테고.
주인의 눈치를 본 헤링어가 웃으며 말했다.
“주인님의 방에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아직 못 여쭈었습니다.”
“설명할 수도 없으시겠지.”
“그렇겠지요.”
미칠 노릇이었다. 루젤은 망연히 헤링어를 보았다. 헤링어는 친절하고 빠르게 말했다.
“밖을 순찰하던 병사들은 근무를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확인했습니다. 주인님께서 간밤에 주무신 침실 밖을 순찰하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방에 비밀 통로가 없다는 것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생각나는 모든 방식으로 비밀 통로가 있을 만한 곳을 뒤져 보았습니다만, 이상 없었습니다.”
점점 더 이상하다.
“그게 가능한가?”
“틀림없습니다.”
루젤은 눈을 깜박였다. 헤링어는 기세 좋게 이었다.
“참고로 레이디 유나의 목욕을 시중든 하녀들의 말에 의하면, 아가씨에게는 날개나 꼬리 같은 것은 분명히 없었답니다.”
“묻지 않았다.”
“참고로 말씀드린 겁니다.”
“불가능한 것은 말할 필요 없다.”
“그렇다면 아가씨가 어떻게 주인님의 방에 들어오셨는가 하는 것에 관한 제 다른 가설도 전부 폐기됩니다만.”
그러니까 날아서 들어왔다거나 악마의 장난이라거나 하는 가설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루젤은 헤링어의 장난스러운 기질이 가끔 귀찮기는 했으나 그의 능력은 늘 신뢰했다. 헤링어가 적당한 가설을 세우지 못했다면 누구에게 물어도 같은 답만 나올 것이다.
“즉 본인에게 여쭐 수밖에 없다는 말인데.”
“예.”
그것은 지금 불가능했다. 헤링어는 또 덧붙였다.
“혹시 해서 시험해 봤습니다만, 아가씨는 우리말을 정말로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외국인인 척하는 사기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루젤은 헤링어가 어떤 식으로 시험해 봤는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헤링어는 유나에게 말을 걸며 몸짓을 보였다.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르지는 않으신가요, 레이디? 필요하신 것은 준비하겠습니다.”
“아직 아침 식사를 안 드렸나?”
“배가 고파야 심문이 효과적인 법이니까요.”
루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배가 부른 포로는 입이 무거워진다. 유나는 헤링어의 몸짓을 잘 알아들은 듯 눈을 굴리다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저 몸짓은 확실하다. 헤링어는 침대 머리맡에 있던 긴 가죽 줄을 잡아당겼다. 멀리서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는 그것을 명백히 신기해하는 얼굴로 흘끔 보았다가 루젤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을 알더니 급히 이불로 시선을 내렸다. 루젤은 자기도 모르게 보고 있던 것이라 당황해서 얼른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유나. 결코 불민한 뜻으로 쳐다본 것은 아닙니다.”
하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헤링어는 하녀에게 음식과 묽은 포도주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유나는 루젤의 시선을 피하며 헤링어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헤링어는 침대가로 돌아와 주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그 질문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무엇을 할지 정해서, 아랫사람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은 그에게 마음 편한 일이었다. 루젤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담담하고 정확하게 말했다.
“경비는 두 배로 강화한다. 경비에 문제가 있어서 생긴 일은 아니라 하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 주인님.”
“혹시 모르는 일이니 이 근방 사람들에게 최근에 낯선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 탐문해야 한다. 그것은 성주에게 맡긴다.”
“예, 주인님.”
“비록 레이디 유나가 이곳 성주와는 연고가 없다 하나, 지금 우리가 가려는 곳은 전장이니 우리가 모셔 갈 수도 없다. 그러나 연고 없는 레이디를 모르는 곳에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은 기사의 도리도 사람의 도리도 아니다.”
“예, 주인님.”
“성주와 이야기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레이디 유나를 예로서 모시도록 부탁하되, 우리가 돌아오면 그때 레이디 유나를 모시고 황도로 간다. 황도에는 다양한 출신의 인재가 많이 있고, 시릴 공도 계신다. 분명 레이디 유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적절한 보호자를 찾는다.”
“예, 주인님.”
전시이니 답이 나오지 않는 일에 너무 신경을 쓸 수는 없었다. 헤링어는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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