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준 laughter@yes24.com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글렌 굴드(1932∼1982)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어느 소설집에서였던 듯싶다. 한여름, 외투에 모자와 목도리, 장갑을 낀 채로 큰 생수병 2통과 접이식 의자를 들고 녹음실에 나타났다는 가냘픈 청년의 이미지, 서른 두 살 이후 일체의 연주회를 거부한 채 스튜디오 녹음 작업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만 자신의 청중과 만나고자 했다는 기이한 이 피아니스트의 이력은 좀처럼 클래식 음악에 귀를 열지 못했던 나 같은 작자에게도(나 같은 작자에게는 특히나) 그 낯선 이름만큼이나 다분히 매력적이었다. 이후 음반을 통해 접한 그의 연주는 "이 사람 정말 유별나네"라는 하나의 인상을 내게 더해주었는데, 그건 그의 허밍 소리 때문이었다. 피아노 선율에 따라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의 흥얼거림은 몰입의 경지에 다다른 신들린 자의 탄식마냥 불규칙적으로 내뱉어지는데, 깊은 울림을 갖는 그 내면의 소리는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신경을 날서게 했던 바흐 음악에 대한 나의 인상을 순화시켜 주었다.
바흐 음악을 가장 완벽하고도 자유스럽게 해석한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괴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전기가 이번에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프랑스 문화성의 음악·무용부서를 지휘하고 감독했던 경력이 있는 미셸 슈나이저의 이 전기물은 매우 독특한 구조를 지녔다. 대개의 전기물이 최대한의 자료와 정보를 수집하여 출생에서 사망까지를 연대기적으로 구성하는 데 반해, 이 책은 글렌 굴드의 대표적 연주곡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글렌 굴드는 그의 레코딩 연주 인생의 시작(1955)과 끝(1981)을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함께 한 깊은 인연이 있다)의 구조를 차용하여, 그의 음악적 생을 구성한다.
'아리아'를 맨 앞과 뒤에 두고, 30개의 다양한 변주곡으로 채워진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똑같은 구조의 틀을 지닌 이 평전에는, 마치 온 저작 기간 내내 헤드폰을 쓰고서 <골드베르크>를 들으며 그 느낌을 적어 나간 것 마냥, 생경하지만 리듬감 있는 음악적(?) 글쓰기―지극히 '프랑스적인'―가 펼쳐져 있다. 이 책은 사건의 전개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내는 전기물이라기보다는 음악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굴드라는 '고독한 인간'의 속살을 만지고, 그 느낌을 적어낸 명상집같이 읽히는데, 저자는 다음 같은 말을 통해 이 평전이 지닌 의미를 설명한다.
"전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굴드는 누구였을까? 나로선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생각했던, 혹은 그렇다고 말하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굴드를 들으며, 굴드에 관해 쓰면서 결국 알게 된 것은 나 자신이다. …전기를 쓰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변명은, 그가 누구인가를 이야기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인가를 찾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 굴드의 여러 기행이 세상에 휘둘리지 않으려는 의지의 발현이고, 자신의 음악과 자유를 지킬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자 한 '작업'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짚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좀더 중요한 이 책의 미덕은 드러난 기행에 가려져 쉬 훼손될 우려가 있는 그의 음악과의 소통을 온전히 지켜내고, 그 감동을 내면화하려는 저자의 속 깊은 태도에 놓여 있다. 바흐를 직접 연주한다는 번역자의 역량과 감성이 연주자 '굴드를 향한 저자의 명상'을 고스란히 한국어로 옮겨낼 수 있었다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