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고든 베닛은 1795년 캘빈주의가 자리 잡은 스코틀랜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24세가 되자 그는 핼리팩스(Halifax)로 이주했다. 핼리팩스, 에디슨, 메인, 보스턴, 그리고 뉴욕 등지에서 교사, 서기, 교정사 등의 직업을 가졌고, 1822년 처음으로 「찰스턴커리어(Charleston Courier)」에서 신문 일을 본격적으로 경험했다. 1년 후에는 뉴욕으로 돌아와 여러 신문들에 글을 기고했다. 1827년과 1828년에 제임스 왓슨 웹(James Watson Webb)의 「뉴욕인콰이어러」 워싱턴 특파원으로 일하는 동안 신문 기사에서 사건에 대한 단순한 기록은 줄이고 뉴스에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여오는 식으로 워싱턴발 뉴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베닛은 1832년까지 웹을 위해 일했으며 그 이후에는 자신의 신문을 설립하려 했다. 1835년, 40세 생일을 몇 달 앞두고, 그는 500달러로 「뉴욕헤럴드」를 차렸다. 그는 187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편집인으로 일했다. 베닛이 미국 저널리즘의 역사상 가장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또한 「헤럴드」가 남북전쟁 이전의 수십 년간 미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널리 읽혔던 신문이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01 평등의 시대와 미국 저널리즘의 혁명: 페니 신문」중에서
대항문화에는 무엇인가에 대한 대항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사회 주요 기관들의 책임자들은 자기 문화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것을 모두 부정하는 듯이 보였다. 그들에 의하면 정부의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것이었고, 사회과학은 정책에 대한 ‘가치중립적’인 안내자였으며, 사회의 직업 구조와 권력구조에서 약진하고 있는 전문가와 경영인들은 ‘중립적으로’, 또는 ‘사심 없이’ 혹은 ‘객관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반면 비판가들의 수는 점점 증가하고 그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들에게 객관성의 수사학은 위선이거나 기만이었으며, 베트남의 경우에는 범죄였다. 대항문화의 객관성 비판은 실제로 존재했던 것보다 더 단합되고 통일된 목소리를 지닌 제도권 문화를 환기시켰다. 그렇지만 현실에는 여전히 기술과 중립성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했으며, 이 때문에 비판 문화가 공개적으로 논의 대상으로 요구한 여타의 가치들이 드러나지 못하게 은폐했다. 객관성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저널리즘 영역에서는 다양한 제도적, 지적 형태로 나타났다. 이들 중 어느 한 가지가 지닌 참신함보다는, 이 모두의 합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독창적이었다.
--- 「05 객관성, 뉴스 관리, 그리고 비판적 문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