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드 뮈세(Alfred de Musset)는 1810년 12월 11일 파리의 문인(文人) 귀족 집안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외조부 모두 시인이었으며, 고급 관료인 그의 아버지는 루소 전문가로서 22권 분량의 ≪루소 전집≫을 직접 출간했다. 어린 시절의 뮈세는 그렇게 자연히 문학적 소양과 함께, 예술, 그리고 루소의 자유로운 사상에 동화된 귀족 자제로 성장해 갔다.
열아홉 살 때인 1897년, 친구 폴 푸셰의 소개로 빅토르 위고의 문학 클럽인 세나클(Cenacle)과 샤를 노디에의 문학 살롱에 입문해 낭만주의 유파에 합류했다. 그는 1830년 1월 경쾌하고 자유분방한 글들을 모은 처녀시집 ≪스페인과 이탈리아 이야기(Contes d’Espagne et d’Italie)≫를 발표함으로써 장래가 촉망되는 낭만주의 신인 작가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오데옹 극장의 무대에 오른 그의 첫 희곡 <베네치아의 밤(La Nuit venitienne)>이 공연 이틀 만에 처참한 실패로 끝나자, 그때부터 상연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독서용 희곡의 집필에 만족해야 했다.
1831년 7월, 뮈세는 ≪파리 평론(Revue de Paris)≫에 <라파엘로의 은밀한 생각>이란 제명의 시를 실어 보수적 논객들의 편협한 취향과 더불어 기교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문인들의 시작(詩作) 태도를 조롱하는 ‘문학 선언’을 발표했으며, 1832년 마침내 위고와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위고가 주도한, 사회적 이념을 추구하는 낭만주의 시에 반기를 든 뮈세는 처절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같은 해 출간된 그의 둘째 시집 ≪안락의자에서 보는 연극(Un spectacle dans un fauteuil)≫은 겨우 생트뵈브와 한두 신문에서의 호평을 이끌어 냈을 뿐, 평단의 고의적인 악평과 냉담한 외면에 맞닥뜨려야 했다.
그러나 1838년 10월,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루이 필리프의 왕세자이자 그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페르디낭 필리프의 배려로 뮈세는 내무부 도서관 사서로 임명되었다. 1845년에는 문학적 공훈을 인정받아 발자크와 함께 레지옹 도뇌르 기사(Chevalier de la Legion d’Honneur) 훈장을 받았다. 1847년 11월에는 뮈세의 희곡 <변덕>이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뮈세의 이른바 독서용 희곡 작품들이 연이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고, 더불어 그의 시도 함께 주목받게 되면서 뮈세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시인으로 부상했다. 1848년 ‘2월 혁명’으로 내무부 도서관 사서 직위를 박탈당했지만 곧 나폴레옹 3세가 주문한 희곡을 집필하는 황실 작가가 되었고 1852년 2월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으며, 이듬해 3월 교육부 도서관 사서에 임명됨으로써 공직을 회복했다.
1857년 심장판막증 증세, 그리고 알코올 중독과 방탕한 여성 편력으로 심각해진 그의 건강은 결핵을 앓게 되면서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마침내 그해 3월 2일 새벽녘, 쓸쓸하게 영면에 들었다.
윤세홍은 서강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문학 공부를 하고자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7대학에서 불어학 학사, 그리고 석사 학위를 받은 다음, 파리 4대학 대학원에서 불문학박사 과정을 이수했다. 빅토르 위고의 시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98년부터 창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프랑스 문학·문화 강의를 맡고 있다. 빅토르 위고 외에도 폴 베를렌의 시적 예술성에 관한 여러 연구 논문들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프랑스 낭만주의 시의 본령을 찾아 알프레드 드 뮈세로 연구를 확대하고 있다. 저서로는 ≪현대 불시 강의≫, ≪프랑스 사회와 문화≫가 있으며, 역서로는 ≪프랑스 설화 여우 이야기≫, ≪위고 시선≫, ≪베를렌 시선≫, 주요 논문으로는 <빅토르 위고의 ‘새로운 시구(詩句)’의 이론과 실제>, <빅토르 위고의 ‘혁명적 각운’의 실제>, <빅토르 위고의 ‘새로운 성서’>, <베를렌 시의 회화성>, <베를렌의 음악적 시>, <베를렌 시의 현대성>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