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집에서 박찬일은 하늘 높이 모자를 던지고 창문을 열고 양말을 던지고 의자를 던진다. 그는 왜 이렇게 하는가? 모자는 하늘로 날아가지만 하늘은 모자를 붙잡지 않고 하늘은 비어 있다. 하느님이 떠났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돌아가길 좋아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돌아가고 싶은 곳이 없다. 그가 모자나 양말을 던지는 것은 모두 어디로 떠난 하느님을 부르고 찾는 행위이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자아와 하느님의 갈등을 노래한다.
그는 하느님이 돌아올 것을 믿지만 하느님은 돌아오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하느님을 망각하고 케이블카에서 추락하고 그의 고향 춘천 소양강 다리에서 뛰어내린다. 그러나 살아야겠다고 고백한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 이후/ 죽는 것은/ 야만”이고 우리는 불법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는 ‘하느님 없는 아프리카’를 꿈꾼다. 나는 이번 시집에서 특히 ?장수막걸리를 찬양함?이라는 시가 좋고 그가 노래하는 빈털터리 의식이 좋다. 언어도 빈털터리, 박찬일도 빈털터리, 나도 빈털터리다. 그렇게 살자. 나는 어제 백담사에서 돌아와 오늘 이 글을 쓴다.
이승훈(시인,한양대 명예교수)
박찬일의 시말은 의미의 의미이고, 초월의 초월이다. 하여 시인의 시말들은 모든 한계의 한계를 가볍게 논파시켜 의미 절대성의 영역에 이르는 동시에 저 극렬한 삶-시간-세계를 총체적으로 살아낸 극한값에 다름 아니다. 저 지고한 절대성과 맞서면서, 혹은 저 절대라고 불리는 것들을 시말 안쪽에 위치시키면서, 시말 전체를 말의 한계 밖으로 탈주시키고 있다. 이중성 위를 욕동하는 시말. 차안과 피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이접시켜 초월조차 초극하는 시말. 박찬일의 시말들은 인륜성과 초월 사이에서 욕동하고 있다. 하여 시인의 시말은 상승하면서 몰락을 긍정하고, 그 몰락을 인륜성으로 극화시킨 너무도 인간적인 너무도 비극적인 시말운동으로 굽이치고 있다.
김석준(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