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파리에 온 실비아 비치는 이 서점의 첫 주인이다. 1919년에 처음 문을 열고, 1921년에는 오데옹 거리 12번지로 옮겼는데, 마침 그때는 젊은 헤밍웨이가 파리에 막 도착한 시기였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구하기 어려웠던 영어로 된 수많은 책이 쌓여 있고, 따뜻한 수프와 글을 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던 이곳은 고국을 떠나온 가난한 젊은 작가들의 포근한 아지트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금지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Ulyssis)』를 1922년 출간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1년 문을 닫고, 지친 실비아도 은퇴해 버려 서점은 역사 속 이야기로 남는가 싶었다.
그런데 10년 후 미국의 방랑 시인 조지 휘트먼이 오데옹 거리에서 멀지 않은 이곳, 노트르담 성당 근처 센 강변 뷔셰리 거리 37번지에 비슷한 서점을 다시 연다. ‘미스트랄’이었던 서점의 이름을 1964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바꾸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다.
2011년 그도 세상을 떠나고, 지금은 그의 딸 실비아 휘트먼이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여전히 열댓 개의 침대를 두고 누구라도 머물며 글을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에세이 한 편 쓰기, 매일 책 한 권씩 읽기, 서점 일 돕기 따위가 서점에 머물 수 있는 자격 조건이라니 꿈같은 이야기다. 이미 4만 명이나 머물다 갔다면 더는 몽상가의 꿈도 아니다.
이쯤 되면 이곳은 그저 오래된 책방이 아니다. 조지 휘트먼이 말한 대로 ‘서점으로 가장한 사회주의자들의 낙원’이고, ‘세 단어로 된 한 편의 소설(a novel in three words)’임에 틀림없다. - 센 강변의 단골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중에서
1920년대 파리 한복판에 던져진 길은 평소 숭배해 마지않던 헤밍웨이와 소설을 논하고, 스콧 피츠제럴드와 거트루드 스타인,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루이스 브뉘엘과 만 레이 등을 만나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신비로운 여인 아드리아나를 만나 설렘을 느끼며 밤거리를 함께 걷기도 한다.
하지만 길이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1920년대 파리에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정작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닌, 벨 에포크(Belle Epoque) 시대를 그리워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시대’라 칭해지는 그 시절.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애틋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둘 앞에 갑자기 웬 마차가 나타난다. 마차는 벨 에포크 시대의 상징 막심 레스토랑으로 둘을 데려다준다. 그곳에서 놀랍게도 툴르즈 로트렉과 에드가 드가와 폴 고갱을 만난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그들은 정작 자신들의 이 시대가 엉망이라고 분노하며 지난날을 그리워한다.
- 당신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중에서
마네가 살았던 시기는 파리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던 시기다. 그가 태어난 1832년은 빅토르 위고가 대작 『레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삼은, 실패로 끝나 버리는 6월 학생봉기가 있었던 바로 그해다. 1848년 2월 혁명과 1851년 쿠데타, 1852년 제2제정 선포와 나폴레옹 3세의 황제 즉위, 근대적 자본주의와 식민지 팽창, 1870년 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등 정치적 혼란은 계속되었다.
오스만의 대대적인 도시 개발 사업으로 제2제정기 파리는 새로운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흔적을 깨끗이 들어내고 새롭게 닦은 도시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모습으로 변했다. 새롭게 부상한 근대 부르주아 계층은 현대 도시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교양 있고 풍족한 문화생활을 즐겼다. 도시의 서민과 빈민은 도심에서 밀려나야 했다. 근대 부르주아의 위선과 가식, 도시 빈민의 고독하고 피곤하고 남루한 일상, 마네는 이 모든 새로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낸 최초의 화가다.
- 비난과 조롱에 맞선 혁명가, 에두아르 마네 중에서
미국에서 건너온 젊은 작가 헤밍웨이가 파리의 카페를 헤매고 다녔을 즈음, 그보다 세 살 많았던,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건너온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 화가도 그곳에 머물렀던 것이다.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한 이 젊은 동서양의 예술가는, 어쩌면 비에 젖은 어느 오후 몽파르나스의 카페 돔이나 라 쿠폴 한 구석에서 한 번쯤 우연히 마주쳤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헤밍웨이가 이곳 파리에서 첫 아내 해들리를 두고 폴린 파이퍼와 사랑에 빠진 것처럼 나혜석도 이곳 파리에서 예술과 인생, 자유와 사랑에 새롭게 눈을 뜨게 된다. 다만 저 미국 남자는 새로 만난 사랑과 다시 결혼하고 고국의 남쪽 끝자락 바닷가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후 수십 년간 더없이 영예로운 날들을 보낸 데 반해, 이 조선 여자는 고국의 남쪽 끝자락 바닷가 도시로 돌아간 것까지는 닮았으나, 파리에서 만난 사랑과 자유가 족쇄가 되어 결국 나락으로 떨어지는 서글픈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여행 중 넷째를 임신한 나혜석은 귀국 후 2개월 만에 아들을 낳는다. 아들 이름을 ‘건(建)’이라고 짓는데 “프랑스가 혁명 이후에 모든 것을 건설했기 때문에 그것을 의미”하는 이름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녀에게 파리 여행은 예술과 인생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돌아온 고국 땅에서 그 혁명을 기반으로 새로운 그림과 사상과 생활을 ‘건설’하고 싶었을 이 여성의 고군분투가 안타깝다. 뜨거운 열정과 빛나는 재능이 가득한, 화가이자 문인이었던 한 여인, 인간 나혜석의 허무한 퇴락이 근 100년이 지난 지금도 두고두고 가슴 아프다.
- 조선 최초 여성 화가의 90년 전 파리 여행
문득, 200여 년 전 이곳에서 거행되었던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 장면이 떠오른다. 루브르와 베르사유에 남아 있는, 다비드의 대작으로 기억되는 그 장면. 스스로 자신의 머리 위에 황제의 관을 올리고, 아내 조세핀에게 황후의 관을 씌우던 그 호기롭고도 도발적인 그 장면. 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웠을 인파를 상상해 본다. 천하를 호령하고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도 십 년 후엔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려야 했으니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여리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 센 강과 시테 섬, 파리의 기원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