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미국 대통령의 중동 민주화 실패 선언 직후 달러화가 폭락한다. 대량의 미국 국채를 가지고 있던 일본은, 미국의 강압으로 국채를 팔지도 못하고 엔화의 동반 폭락을 앉아서 볼 수밖에 없다. 일본 국내의 주식 및 채권 폭락으로 기업 연쇄도산과 국가 재정파탄의 대혼란이 발생하고, 일본정부는 2007년 모든 예금인출을 막아 버리는 극약처방을 실시한다.
연금지급이 중단된 노인들, 저금이 날아가 버린 퇴직자와 실직자, 노숙자들이 길거리에 우글대는 일본 ― 도쿄 바로 코앞의 공업도시 가와사키에는 세계 최대의 노숙자 집단 거주지까지 형성되어 있다. 제3세계 난민촌의 모습이 일본에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주변국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의지가 부족했던 데다가 돈까지 없어지니 국제적 영향력도 뚝 떨어져 버리고, 그런 일본을 공개적으로 홀대하며 군사 ? 경제적 파트너 자격을 재고하는 미국. 실추된 자존심과 증오는 대중영합적 반미감정과 충동적인 핵무장론 선동으로 이어진다.
한편, 북한은 2008년 미국과 핵사찰 합의 및 평화조약을 맺어 김정일 체제에 대한 보장을 받는다. 2010년, 북한의 소수 개혁파 최고지도부는 날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는 중국의 ‘괴뢰정권’ 수립 움직임에 대한 성동격서(聲東擊西) 무력시위인 동시에 자기통제력 상실로 치닫는 정신 나간 일본을 완전히 수렁 속으로 몰아넣기 위한 음모를 수립한다.
작전명 ‘반도에서 나가라’ ― 공화국의 대미협조와 남북관계 진전에 반발하고 있으며 자원과 돈을 빨아들이는 골칫덩이인 동시에 쿠데타군 후보 1순위인, 세계 최대 규모 특수전 군단 전체를 일본의 서쪽 변방인 규슈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이들을 ‘반란군’으로 가장하여 대외적으로 발표하면, 경제로 얽힌 주변국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일본은 이들이 ‘망명 군대’인지 ‘침략군’인지 여부를 신속히 규정할 수 없어 어정쩡한 반응만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규슈는 중앙정부에서 무시당한다는 지역민심이 강한 곳이라, 지방에 뿌릴 재정이 바닥난 일본정부와 손발이 맞을 리가 없을 것이다. 적국 일본을 치는 민족적 거사에 특수전 군단이 반발할 수도 없다.
2011년 4월 2일, 완벽한 일본어가 가능한 북한 선발대 9명이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리는 후쿠오카 돔(現 야후재팬 돔)을 점거하고 3만 관객을 인질로 잡는다. 선거를 앞두고 분주한 정치인들과 처음 당해보는 일에 어쩔 줄 모르는 일본정부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북한군 증원부대 484명이 특수침투용 수송기를 타고 도착, 후쿠오카를 사실상 점거한다. 이들은 스스로를 ‘고려원정군’이라 칭한다.
처음에는 지방 정치인들을 협박하여 ‘공존’의 기자회견을 행하고 12만 후속부대가 선박으로 일본에 상륙할 것이라는 사실도 공표하는 언론플레이를 행한다. 무기력한 일본정부는 스스로 후쿠오카 봉쇄, 규슈 교통차단이라는 자충수를 두고 오사카 지방경찰의 특수부대를 이용한 고려원정군 생포작전을 벌인다.
책임소재가 불분명한 이 작전은 자국민에 대한 테러라는 해외 언론의 평가 속에 대실패로 끝나고 후쿠오카의 민심은 도쿄의 중앙정부에서 완전히 돌아서 버린다. 일본정부의 유일한 탈출구는 한때 재정분담금 규모 2위였던 UN에서의 호소 밖에 없는 것이다.
사회적 평판이 좋지 않은 부자들을 체포, 고문하여 재산을 몰수하는 북한식 수용소 시스템에 대해 규슈의 밑바닥 민심은 환호한다. 국가와 국민의 관계, 주권 논쟁, 에너지 시설 테러가능성 등과 같은 현실과 유리된 때늦은 논란만이 규슈를 뺀 일본사회 전체를 뒤덮고 있는 가운데, 사회적 부적응자로 낙인찍힌 무정부주의 집단만이 고려원정군에 대한 반란을 꾀한다.
한편으로 북한군 엘리트 출신 장교들도 자신들이 배워온 것과는 너무나 다른 일본의 현실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식의 혼란을 느끼게 되고, 상황은 예측불가의 점입가경으로 흘러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