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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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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시간과 공간이 정지하는 방

이외수 저 /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7년 08월 2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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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490g | 152*200*20mm
ISBN13 9788965746317
ISBN10 896574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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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할머니와 같이 살았다. 어머니는 두 살 때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전쟁통에 행방불명이 되고, 나는 할머니와 동냥밥을 얻어먹거나 이삭을 주우면서 끼니를 연명했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산 밑 다 허물어져 가는 초가 움막이었다. 날마다 잠에서 깨어나면 대낮에도 컴컴한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움막 안에는 아무도 없고 어둠과 함께 적요만이 나를 짓눌러 왔다. 어둠 속의 적요는 곧 공포였다. 다섯 살 때였다.
우리가 사는 움막은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거적때기를 들추고 밖으로 뛰쳐나가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는 마을 어디쯤엔가에서 동냥밥을 얻고 있거나 이삭을 줍고 있을 할머니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고래고래,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울어 댔다. 그러나 아무리 울어 대도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적요가 공포다.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또한 공포다. ---「1장 적요는 공포」중에서

내가 전라도 어느 지역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평소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던 조폭 오야붕이 내 차를 운전하게 되었다. 자기가 있는데 절대로 형님이 직접 운전대를 잡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이 녀석, 고속도로를 내달리던 중 안전 설치물이 없는 길이 나오자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 유턴을 해 버린다. 기름이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하향선 쪽 주유소가 가깝다고 했다. 나는 녀석을 심하게 나무랐다. 의기소침해진 조폭 오야붕. 녀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나 고속도로를 내달렸을까, 녀석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형님 말입니다. 지는 전생에 무얼 하면서 살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제가 쓴 시는 기억나지 말입니다.”
“니가 전생에 시를 썼단 말이냐?”
“그렇지 말입니다 형님.”
“함 읊어 봐라.”
녀석은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느린 목소리로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이런 개시키!” ---「2장 청량한 액체 상태」중에서

가끔 어떤 글이 좋은 글이냐고 내게 묻는 이들이 있다. 물론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글 속에 정신적, 영적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어서, 읽을 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보다 나은 쪽으로 변모시키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국정교과서적으로 대답한다. 좀 거창한가. 쓰고 보니 나도 밥맛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면, 읽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고 나아가 세상을 보다 나은 쪽으로 변모시키는 글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을까. 일단 읽는 맛과 감동을 겸비하고 있다. 재미없는 글을 끝까지 읽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문자 고문을 끝까지 당해 달라는 말과 같다. 대개 감동과 재미를 겸비한 글들은 발효된 진실이 배합되어 있다.
---「3장 털갈이의 계절」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꽃이 영원토록 색깔도 변하지 않고 시들어 떨어지지도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바람이 꽃에게도 좋은 바람일까. 꽃은 시들어 떨어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열매를 맺어야 꽃의 사명을 다할 수 있다.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7장 기다림 속 희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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