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사람과 같은 건물에 있다는 건 역시 피곤할 때가 훨씬 많다. 아무리 층이 달라 자주 마주칠 일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어쨌거나 이 건물은 아버지의 소유이고 그녀야 얹혀 지내는 것뿐이지만, 그는 달랐다. 아니, 그때와는 사정이 조금 다른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서 층별 안내도에 보이는 바움 법률사무소의 이름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내렸을 때 로비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남자가 시선에 들어와 그녀는 이마를 긁적였다.
단정한 슈트 차림에 짙은 회색의 울 롱코트를 입은 채 걸어오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그의 옆엔 법률사무실 직원들도 있었다. 직원들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굳어졌다. 남자는 그녀를 발견하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붙였다.
“밥 먹었어?”
“아직.”
“그러다 또 위염 온다.”
얼마 전에 위염이 심해 새벽에 위경련까지 와 그가 얼떨결에 병원으로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 뒤로 밥을 제때 챙겨먹으려 노력하고 있는 중이기는 했다.
“그러게.”
“나중에 봐.”
“그래.”
그가 먼저 그녀를 지나쳐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직원들은 눈치를 보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스쳐지나갔다. 왠지 입안이 쓰다.
저 남자와 어떤 사이냐 묻는다면……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이혼한 사이다.
◇ ◆ ◇
“청승맞게 뭐 하니?”
오늘은 선배의 전시회가 있는 날이다.
카페 안으로 들어오며 혜령이 태이의 어깨를 툭 치고 앞자리에 앉아 먼저 시켜놓은 키위주스를 벌컥벌컥 마셨다. 입덧이 심해 키위주스밖에 마시지 못하겠다는 혜령을 보며 그녀도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밥은?”
“대충.”
“너 그러다 또 병원 실려가. 한태이, 정신 좀 차리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혜령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만 보면 사람들은 밥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다들 먼저 하는 말이 밥 먹었냐는 거라니.
워낙 단골 카페라 그런지 혜령은 카운터 앞에 서서 바리스타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곧 생크림이 듬뿍 올라간 허니 브레드를 가지고 와 내밀었다.
“먹고 출발해. 너 또 뭐 라면 이런 거 먹은 거지?”
“아니야.”
“아니야?”
“삼각김밥.”
그 말에 혜령이 혀를 찼다. 사실 건물 앞에 있는 맛집으로 유명한 일식집에서 초밥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를 만나서 입맛이 뚝 떨어져 결국 향한 곳은 건물 안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그래도 밥은 먹고 약은 먹어야겠다 생각해서 삼각김밥 하나를 사서 우걱우걱 씹어댔다.
결국 혜령이 허니 브레드 조각을 뜯어 생크림을 듬뿍 찍은 뒤 태이의 입에 집어넣어주었다. 우걱우걱 씹어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겨우 한입을 먹고 나서 포크로 죄 없는 생크림만 찍어대고 있자 혜령이 접시를 빼버렸다.
“왜? 오늘 유지환이랑 마주치기라도 했어?”
“귀신이다.”
“너 그냥 그 건물에서 나와. 너 돈이 없니, 뭐가 없니? 뭐하러 거기로 나가. 너 설마 아직도 유지환한테 미련 남았니?”
“미련은 무슨.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무슨 사이긴. 이혼한 사이. 그것도 1년 하고 한 달이나 같이 산 사이. 너희 아버지는 뭐 그런 남자를 소개시켜주신 거야. 가진 건 쥐뿔도 없고, 그나마 직업 좋다는 거?”
태이가 눈을 크게 굴렸다. 지환의 직업이 좋은 건 맞다. 비록 1년밖에 하지 않았지만 검사 출신 변호사였으니까. 하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그래서 태이가 결혼을 할 때 여기저기 말이 많이 돈 것도 사실이었다. 사학재벌의 딸이 가진 것 없는 변호사에게 시집간다면서 말이다.
지환은 부모님이 안 계셨다. 할머니 소원이 검사라고 해서 그냥 검사를 했다고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검사를 미련 없이 그만두었다나? 그녀의 아버지가 작은 소송에 걸려 있을 때 의뢰자와 변호사로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넌 지환 씨하고 같은 학교라면서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왜긴. 너하고 이혼했는데 그럼 좋게 보이겠니?”
혜령은 대학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녀가 결혼을 한다면서 지환을 소개시켜주었을 때에는 학교 선배라며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지환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준수한 외모와 좋은 성적으로 인기가 무척이나 많았다고 했다. 그때의 혜령은 지환을 칭찬하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욕을 하느라 입이 모자라 보였다.
“여자 문제 없는 남자는 없나 보다.”
“상현 씨도 그러니?”
“어머, 우리 상현 씨는 너도 알다시피 나밖에 모르지.”
살짝 불러온 배를 쓰다듬으며 혜령이 말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태이도 결혼을 하면서 크게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지환과 결혼을 하지 않으면 할머니가 남겨주신 별채를 없애버리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에 넘어간 것이다. 그냥 바람을 피우더라도 들키지만 않았다면 계속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엄연히 말해 그걸 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그 ‘일’을 목격하고 태이가 이혼을 말했을 때 지환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너무 순순히 받아들여 오히려 놀란 사람은 태이였다. 옆에선 남자가 술을 마시고 실수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며 오히려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혼을 하면서 지환은 몸만 그대로 빠져나갔다. 들어왔을 때도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통장으로는 매달 일정액이 들어오고 있다. 위자료는 됐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선보러 나간 건 어떻게 됐어?”
혜령이 입을 크게 벌려 허니 브레드를 먹었다. 하여간 말만 입덧이다. 언제는 키위주스밖에 못 마시겠다더니. 태이는 트레이를 혜령의 앞으로 더 밀어주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재.”
“오, 이번엔 잘될 것 같다. 뭐 하는 남자야?”
이혼을 하고 나서 선을 몇 번이나 봤던가. 어머니인 윤 여사의 등쌀에 열댓 번은 나간 것 같다. 꽤나 괜찮은 남자들이 제법 나왔다. 대한민국에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남자가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물론 윤 여사가 고르고 고른 것이겠지만. 개중엔 재벌 3세도 있었고 벤처 사업가, 전문직 종사자도 있었다.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한 건 역시 그녀의 이혼 경력도 있었고, 그녀 자신이 딱히 흥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처음으로 두 번째 만나는 거 아니야?”
“다짜고짜 약속을 잡아서.”
“그 남자가?”
“응. 좋은 분 만나셨으면 좋겠네요 했는데, 그럼 수요일 저녁 같이 먹자고 해서.”
“웬일이야. 잘생겼어? 키는 커? 뭐 하는 남잔데!”
태이가 눈동자를 굴리며 정주를 떠올렸다. 어떻게 생겼었더라……. 고작 닷새가 지났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키는 보통보단 컸던 것 같고, 세화 병원 의사. 부모님은 부산에서 병원 운영하신대.”
“오, 괜찮다. 이번엔 잘 좀 해봐.”
그 말에 태이가 픽 웃었다. 사람이 괜찮을 수 있다는 건 어떤 것을 보고 말하는 것일까. 그 사람이 가진 직업, 지위, 외모? 이젠 도무지 모르겠다. 혜령이 빵을 먹다 말고 그녀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총각 맞아.”
“그렇지? 너희 어머님이 보통 분이시니? 제발 그 남자하고 잘됐으면 좋겠다. 그래서 유지환 땅을 치고 후회하게.”
“우리 서로 좋아서 한 결혼 아니야. 그러니 후회할 일이 없지.”
“그래서, 그 유지환은 지금 신미주 만난대?”
태이가 고개를 저었다. 미주는 지환과 대학 시절 사귀었던 여자였다. 그리고 이혼에 막대한 영향을 준 여자이기도 했다.
“나는 한태이 너도 진짜 이해가 안 가. 뭐? 둘이 계속 만나는 거 안 들켰으면 이혼 안 했을 거라고?”
“이쪽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니?”
“얘, 얘, 이거 네 일이야. 이거 보니까 아직도 만나네. 너 완전히 기만당한 거라니까?”
“만나는지 안 만나는지는 저도 모르겠구요. 이제 일어나자. 이번에 승연 선배 그림 좋다더라.”
이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라 혜령을 부추겼다. 하여간 어디 한번 앉으면 엉덩이가 떨어질 줄 모른다. 물론 혜령이 궁금해하는 것도 이해는 한다. 유지환은 고등학교 시절에도, 대학 시절에도 눈에 뜨일 만큼 유명 인사였으니. 그런 인물이 친한 친구와 결혼을 하고 결국 이혼까지 했으니 혜령도 얼마나 궁금하겠는가. 말이 없는 친구를 둔 것을 안타까워해야지 어쩌겠는가.
친구가 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혜령은 태이를 보고 넌 속말을 너무 안 한다며 거리를 둔 적이 있었다. 그것도 금세 풀리긴 했지만 이럴 때면 여전히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나 오늘 간만에 외출한 거거든? 이거나 좀 다 먹고 일어서자.”
그 말에 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입덧이 심하긴 한지 혜령은 임신 사실을 알고 한 달 가까이 외출을 못 하긴 했었다. 그래도 태이가 먹을 것을 사들고 가면 또 잘 먹었다.
“천천히 먹어.”
입술에 생크림을 묻혀가며 먹는 혜령을 보고 태이가 팔을 뻗어 티슈로 닦아주었다. 정말 혜령이 엄마가 되기는 하는 건지 신기했다.
“내가 맨날 너 사진 보고 빌잖아. 성격은 몰라도 얼굴은 우리 한태이 닮게 해주세요 하고. 상현 씨도 같이 빌어.”
“어떻게 날 닮니?”
“유전자를 거슬러보자는 거지. 우리 한태이가 다른 건 몰라도 얼굴은 잘났잖아?”
혜령이 입을 크게 벌려 빵을 집어넣었다. 대학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혜령이 ‘너 미스코리아니?’라고 하는 바람에 태이는 꽤 주목을 받았었다. 그런 주목은 정말 좋아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괜히 생김새 때문에 불편한 일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결혼하자며 웬 아저씨들이 교문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그 뒤론 집에서 운전기사를 보내주었다. 덕분에 또 유명인이 되고 말았다. 내성적이라 어려서부터 주목받는 건 정말 딱 질색이었다. 다행히 대학에선 혜령이 옆에서 많은 실드를 쳐주어 제법 수월하게 다니기는 했다.
“너 좀 많이 먹어. 살 좀 빠진 거 같아.”
“안 그래도 저번 주에 병원 다녀왔어.”
“병원? 왜?”
“위경련으로 실려갔지, 뭐.”
“부모님 놀라셨겠다.”
“오피스텔에 있다가 실려갔어. 부모님은 지금도 모르셔.”
“그럼 나라도 부르지! 누가 왔어? 오빠?”
“지환 씨.”
그 말에 혜령이 입을 벌리고 태이를 보았다.
“내가 아직도 전화기에서 번호를 안 지웠더라.”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