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나이에 나는 정복을 경험했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때 이미 상실이 뭔지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야. 왜냐하면 내가 뭔가를 정복한 것은 결코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거든. 난 어떤 사람이 되었든 간에 거기에 머물려 하지 않았어. 그 반대였지. 일단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다면, 그 다음 순간 바로 그에게서 벗어나야 했지. 그게 누구이든 다음 차례에 될 바로 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거야, 얘야. 바람이 있어야 만족이 있으니까. --- p.14
내 아들은 뭔가를 짓고 싶어하지도, 창조하고 싶어하지도, 만들어내고 싶어하지도 않아. 내 아들은 무엇보다도 세상의 질서를 바꾸고 싶어하지 않아. 내 아들은 만사가 평온하기만 원하지. 모든 것이 가능한 시기에, 나라면 먹고 살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숨을 걸었을 시기에 내 아들은 고요와 감미로움을 원해. 내 아들은 평화 속에서 대수롭지 않은 그의 영혼의 상처를 돌보기를 원한다고. --- p.62
죽음은 우리 안에 있어. 죽음은 점차적으로 영역을 넓혀간단다. 조금조금 모든 것이 섞이고 서로 비슷해지지. 얘야, 어떤 나이부터는 모든 것이 똑같아지고 더이상 목적지를 갖지 못하게 돼. 만약 신이 나로 하여금 권태를 그렇게 못 견디도록 만들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결국 공공장소의 긴 의자에 앉아 시간의 승리에 대해 곱씹고 있는 저 얼빠진 노인들 중 하나가 되었을 거야. 그 점에 대해 난 신에게 감사해. --- p.77
오, 신이여, 나로 하여금 단 하루만이라도 다시 살게 해주소서. 한 시간이라도 뭔가에 홀린 상태로 살게 해주소서! 나를 다시 뭔가에 홀딱 반한 사내가 되게 해주소서. 미친놈이 되어도 좋고 범죄자가 되어도 상관없나이다. 그 어떤 형태든 간에 평온과 안정을 두려워하던 과거를 내게 다시 돌려주소서. --- p.78
얘야, 넌 네 행복한 삶 속에서 치유불가능한 고독을 느껴본 적 없니? 롱샹의 꽃공원 한가운데서 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네가 엄청난 동질감을 느끼는 한 여자가 이야기를 하고 있어. 균열을 더듬어가는 것 같은 이야기를. 넌 알아, 그 여자와 다시 만날 거라는 그 어떤 희망도 없고, 영혼은 혼자 살아가며, 상대방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 p.91
지성이라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우리는 삶 앞에서 그토록 무방비 상태인데 말이에요. --- p.111
삶을 붙잡고 흔들렴. 그래, 나는 그렇게 했단다. 하지만 보렴, 이 일에는 주어진 규칙 같은 건 없어. 그리고 삶이란 말이다, 얘야, 만만하게 흔들려주질 않는단다. 인간은 안락을 바라지. 삶을 뒤흔든다는 것은 정말이지 필사적인 길로 접어드는 거란다. --- p.115
이런 상황에서 내가 내 자손의 어리석음에까지 적응해야 할까, 여보? 어떤 존재의 세계관이 나로 하여금 욕지기를 불러일으키는데, 그 존재를 내 유전자를 받았다는 이유로 용서해야 할까? 한마디로 말해서 어느 누구와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못난이를 마지막 대면이라는 이유로 인정해야 할까. 할 수 있었다면 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겠지. 낭시, 난 아들이 세상의 나머지와 닮지 않는 게 좋다는 철학을 갖고 있어. 내 철학 속에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것은 아들에게는 좋은 게 아니라고. --- p.123
일단 청춘의 격변기가 끝나자 넌 다시 평균치의 대열 속에 자리를 잡았어. 반항의 흔적 같은 것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었지. 복수의 흔적도 더이상 없었고, 열정의 흔적도 더이상 없었어. 한 남자를 만들 자양이 되는 모든 것, 그를 강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조건을 넘어서도록 이끌어줄 모든 것을 너는 망각의 뒤안길 속에 던져버렸어. --- p.125
여러분에게 내 아들을 소개합니다. 잘린 꽃다발에서 나온 한 송이 잘린 꽃 같은 녀석이죠. 나는 네가 차라리 범죄자거나 테러리스트이기를 바라. 행복의 투사보다는 말이야. --- p.126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큰 결핍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니? 넌 그걸 느꼈니? 너는 상대가 네 말을 듣고 있고 네가 사랑받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상대는 줄곧 그 자리에 없었던 거야. 네 방심은 말이다, 아들아, 지독하단다. 나는 네 손을 잡을 수 있지만, 그 순간 네 마음은 까마득히 먼 곳에 가 있지. 우리는 최소한의 것도 함께 할 수 없단다. 네 눈 속에서 나는 너의 몰이해와 나의 늙음을 읽는다. 포기를 읽고, 고독을 확인하지.
--- p.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