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을 지지하는 행위의 가장 큰 도덕적 강점 중 하나는 단순히 끔찍한 불평등의 증거를 드러내는 것뿐 아니라, 소득과 부의 거대한 격차로 인한 자유의 침해에도 관심을 조명해준다는 것이다. 평등과 자유는 별개의 목표가 아니다.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은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의 자유를 해치고 있다. 거꾸로 생각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부자유, 즉 자신들의 주인인 부유한 자들에게 허락을 받아야만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노동계급의 부자유는 불평등을 더욱 악화시킨다.
빈곤은 단순히 궁핍이나 물질적 욕구의 불충족 또는 소득 격차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자의적인 변덕과 탐욕에 대한 의존, 자부심의 소멸, 고립, 가난한 자에 대한 사회적 격리도 빈곤이다. 자신의 물질적 생존이 불확실할수록 ‘첫 일자리 계약’, 임시 계약, 계약 부재, 불안정성, 직무 ‘유연성’ 그리고 어떠한 사회적 보호도 없는 완전한 실직 등의 형태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어 더욱 고통받게 된다. 이러한 자유의 침해는 나아가 금융소득이나 기업소득은 하늘을 찌를 듯하면서도 실제 월급은 감소하는 현상, 불안정한 퇴직연금, 공공 서비스와 기반 시설의 취약화 또는 사유화 등의 형태로 물질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중략)
이 같은 심각한 불평등이 어떻게 절대다수의 자유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 수 있을까?
--- p.42~43
또한 기본소득은 자영업을 시작할 때 발생하는 위험을 크게 줄일 것이다. 여기에서 한 달에 960유로를 버는 바티스타의 예로 돌아가 보자. 그에게 매월 430유로의 기본소득이 지급된다고 해보자. 그는 위험을 감수해 세 명의 다른 사람과 함께 란제리 가게를 열고자 한다. 바티스타와 그의 동업자들은 가게를 차리기 위해 3만 유로의 돈을 빌린다(일인당 7,500유로의 대출은 현실적이다). 한 달에 430유로의 돈을 받아서 생기는 안정감과 하루의 시간이 전부 빈다는 것은 바티스타와 그의 동업자들이 창업을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좋은 출발점이다. 우리가 바티스타와 동업자들이 유난히 낮은 위험 기피성을 갖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 것에 주목하자. 만일 그랬다면 그들의 사업 규모는 앞의 예보다 훨씬 컸을 수도 있다. 소상공업의 초창기에 기본소득은 창업을 하면서 생길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기피를 극복하게 해주는 보조금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위험 기피를 줄여주는 것뿐 아니라 더 큰 혁신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 p.116~117
우리가 자유와 평등은 따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공화주의적 원칙에서 출발한다면, 다른 사람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등한 상황에 있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그리고 수백만 인구의 자유가 거대한 사회적 불평등에 의해 가로막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빈곤한 사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대로 빈곤한 사람이 겪는 자유의 박탈과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오늘날의 불평등한 현실을 더 악화시킬 따름이다.
기본소득은 빈곤을 없애자는 제안이다. 이 제안이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추구할 만한 목표라면 그 이유는 명확하다. 모든 시민의 물질적 생존을 보장함으로써 빈곤을 없애는 것이 자유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빈곤을 없애야만 사람들은 평등해질 수 있다. 이는 서로 간에 자유롭다는 말이고, 물질적 생존의 수단을 갖춤으로써 자유롭다는 사실을 서로 인지한다는 뜻이다.
--- p.149
이제부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흥미로운 세 가지 예를 살펴볼 것이다. 먼저 가장 야심찬 첫 번째 예를 보자. 이 예는 연간 5,414유로 또는 매월 451유로의 성인 기본소득과 그 절반인 미성년자 기본소득을 중립적으로 지원(말하자면 현재와 같은 조세수입과 기본소득에 필요한 만큼의 조세수입을 합한 액수를 징수한다는 것이다)할 수 있는 비례세율을 알아낸다는 개념이다.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필요한 명목세율은 49.9퍼센트였다. (중략)
이와 같은 기준에 따라 이 시뮬레이션은 49.9퍼센트의 일률 과세를 필요로 한다. 당연히 명목세율은 실질세율과 매우 다를 수 있다. 이 내용은 표 8.5에서 십분위로 정리되어 있다. 이 정도 세율이면 표본 내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 기본소득의 예산(236억 1,350만 유로)을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의 소득세율을 적용한 세입(95억 110만 유로)을 포함해도 충분한 세원(326억 1,980만 유로)을 마련할 수 있다.
--- p.215~216
지금껏 부자들의 특권이었던 무언가를 가난한 사람이 (아주 제한적이나마) 할 수 있을 때, 흔히 의존 혹은 기생이라는 비난이 뒤따른다. 부유한 사람들이 상속받은 부로 일생 동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도, 가난한 사람이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삶을 잠시라도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소득은 가장 부유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으며 생존하는 것이다.
아직도 못마땅한 비판자는 사도 바울이 오래전 테살로니키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강요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원칙이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토지나 자본이 없는 그 누구도 배고픔을 견디거나 굶어죽는 것이 선택지가 아닌 이상에야 더 나은 것을 찾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현재의 직업을 그만둘 수는 없다. 임금을 받기 위한 노동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뿐이다. 만약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이 가능성은 설령 제한적이라 하더라도 모두에게 열릴 것이다. 오늘날 현실에서 사도 바울의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라는 ‘정의로운 원칙’은 오직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 부자들은 일하지 않는다고 해서 배고픔을 느낄 일이 없다.
--- p.228~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