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다섯 살이 됐을 때 나뭇가지처럼 말랐던 내 몸은 곡선미를 드러내며 “여성스러운” 모습으로 급변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저울이 45킬로그램 이상을 가리켰다. 아이 티를 벗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다. 문득 캠프에 봉사자로 참여해 오랜 시간 설거지를 하며 친구들과 우정을 쌓는 내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환영하면 그들은 예전과 달리 삼시세끼를 먹는 복을 누리게 되겠지.
하지만 그해 여름은 정말로 힘겨웠다.
서핑을 즐기고 건강식과 영양제를 사랑하는 남자 아이를 만나게 됐다. 그는 내 친한 친구의 굴곡진 몸매가 식습관 때문이라며 비판했고, 심지어 수영장에서 몰래 친구의 사진을 찍었다. 또 캠프 음식에 살아 있는 효소가 부족하다고 불평했다. 바닐라로 코팅된 초콜릿 컵케이크 두 개를 단숨에 해치우는 내 모습을 그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봤을 때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사귄 한 남자 친구는 자기가 마시는 유기농 과일 주스를 나눠주고, 버거킹 치킨 샌드위치를 향한 나의 사랑을 한심하게 생각하더니 저 멀리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가족들이 운영하는 식품 생활협동조합에 대해 말해주었다(나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지만 말이다). 나는 너무 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혼났고(“목사 딸이 그러면 되겠니!”), 성희롱 사건을 목격하고 알렸을 때도 혼났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남자 친구를 만나고 다닌다고 혼났다.
언젠가부터 내 배는 점점 무거워졌다. 마치 모든 염려가 맹장 쪽에 있는 혹으로 몰리는 것 같았고, 그 혹은 날마다, 특히 식사를 거듭할수록 더 커지는 듯했다. 불어난 내 몸뚱이가, 아니 나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껴졌다. 남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시기상조였으며(당시는 “노 데이팅”하던 시대였으니까), 내 식생활도 완전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서로 관련 있는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나의 몸무게를 더 이상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없게 됐고, 이전의 체중으로 되돌아가야겠다는 절박감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을꼬.
그로부터 십 년 동안 매일, 나는 무질서한 식습관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다. 내 이야기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안고 있는 식습관 장애보다 아주 약간 더 극적이지만 드라마에 나올 정도는 아니다.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고, 모두 먹을 수 있고, 몸을 최대한 적게 움직이면서도 날씬해 보이는 동시에 건강해 보이길 바라는’ 마음은 우리 모두가 지닌 심리다. 잡지와 TV 프로그램과 영화에서 미셸 파이퍼나 카메론 디아즈 같은 미녀들을 데려다 놓고는 “이 사람들은 실존 인물이야. 이들처럼 되어야 한다고!”라며 던지는 메시지를 꼭 내게 하는 말인 양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거울 속의 나는 평발에, 발목은 퉁퉁하고, 무릎 뼈도 우락부락하고, 어깨는 딱 벌어졌고, 눈 밑은 시커멓고, 머리는 곱슬이었고 눈빛은 우울했다. 내 외모는 괜찮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지 않는가.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날씬해질 수도 있다”는 광고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광고가 지시해 주는 대로 체중 감량에 좋다는 크롬 보충제, 운동장비, 에어로빅 비디오, 발목에 차는 모래주머니 등을 모두 갖춰 내 몸매를 바꿔 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 씨름에서 최악의 문제는 바로 내 마음 속에 있었다.
몸매에 집착하는 내 자신이 정말 싫었다. 내 몸도 미웠다. 늘 배가 고팠고 먹고자 하는 갈망이 불일 듯 일었다. 그동안 마조 볼(유월절 무교병을 갈아 양념하고 반죽해 만든 빵―옮긴이) 수프나 매콤한 시금치 새우 커리같이 풍미 있고 식감 좋은 음식을 즐겨 만들어 먹었지만, 이제는 먹기가 두려워졌다. 나는 하나님에게 받은 은사를 활용하고 좋은 책도 많이 읽고 또 언젠가는 쓰기도 하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었지만, 나 자신과 바지 사이즈에 대한 생각을 끊지 못했다. 교회에서도 뾰족한 수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음식과 몸과 다이어트에 대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취하는 태도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당신의 몸매를 완벽하게 가꿔야 한다”는 광고에 제대로 반박하는 신학도 나타나지 않았다. 일반 문화가 다이어트 컨설팅 그룹을 만드는 동안 교회는 날씬해지는 비결을 담은 책과 다이어트 전략을 내놓음으로써 외모를 중시하는 “세상적인” 흐름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린 거버는 체중 감소와 성적 지향을 다룬 책(Seeking the Straight and Narrow)에서 마음과 생각을 변화시켜 몸매를 바꾸는 일에 매진하는 두 복음주의 조직에 대해 연구했다. 하나는 대형 교회 중심의 체중 감소 프로그램이고, 다른 하나는 동성애자가 이성애자가 되도록 돕는 프로그램이다. 거버는 복음주의 기독교 밖의 사람들은 동성애 개조에 대해서는 논쟁적인데 체중 감소 프로젝트에 대해선 교파와 상관없이 의견이 일치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뚱뚱한 사람도 사랑하신다는 선언에도 건강에 대한 경고가 따라온다”고 말한다. 『크리스천 다이어트』(Free to be thin, 미션월드라이브러리)의 저자 네바 코일은 체중이 다시 늘어난 뒤에 예전의 추종자들에게 날선 비판을 받았지만, 스스로를 “더 크게 사랑받는” 존재라 여기고 있었다. 이 책은 물론 체중 감소와 거룩함이 서로를 견고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는 책들에 비해 별로 팔리지 않았다. 뚱뚱한 모습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다. 따라서 성적 지향의 개조는 뜨거운 논란거리인데 비해 몸매의 개조는 무비판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체중 감소는 이루기 힘든 목표이고 또 오래 지속되기 어려움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은 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은 음식만 조절하면 지금보다 훨씬 멋진 몸매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북아메리카 사람들은 역사적으로나 전 지구적으로나 소득 대비 식료품비가 가장 낮은 편이다. 오늘날의 산업형 농업이 식품을 값싸게 대량으로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에 가깝다. 기나긴 인류의 음식 역사에 비춰보면 오늘날의 가장 평범한 식사도 하나의 경이로운 사건이다. 그러나 상추와 토마토를 곁들인 치즈버거 세트처럼, 만원 꼴도 안 되는 평범한 음식이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토양 고갈로 인해 지나친 화학 비료가 사용됐고, 화학 물질 배출로 인해 “죽음의 지대”(dead zone)가 생겨났고, 화석 연료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됐으며, 가축은 학대당하고 노동자는 착취당했다. 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할 식품들이 값싼 음식을 만드는 데 과잉 공급됐는데, 이로써 자녀의 기대수명이 부모보다 짧아지는 현상이 최초로 발생했다. 저질 음식을 너무 많이 섭취한 결과다.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