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0시가 되면 5분간 저와 제 가족의 건강을 비는 기도를 올릴 거구요, 0시 5분에 마음에 담아둔 여학생에게 편지를 쓸 거예요. 반쯤은 장난삼아 한 말이지만 행동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중략)
그러나 영산포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장흥으로 가는 사이에 생각이 흔들렸다. 윤희에게 다가가려면 아직 그를 떠나지 않은 결핵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했다. 그런 사실을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로서는 죽기만큼 싫었다.
장흥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탄 뒤에는, 오래전부터 위통을 앓는 아버지와, 그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동생들 얼굴이 떠올랐다. 윤희가 어떤 집안 출신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간에 그들과 윤희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마을 앞 정거장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며, 영운은 윤희에게 편지를 쓰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움마저 끝난 것은 아니었다. ---「1월 1일 0시 5분」중에서
나는 화영을 사랑하는가? 사랑이 그리움이라면, 화영을 애태워 그리워하는가? 그건 아니었다. 사랑이 담는 것이라면, 그가 곁에 없을지라도 그를 넘쳐흐르도록 가슴에 담고 있는가? 그것도 아니었다. 따져 보면 윤희보다 화영이 못 할 게 없었다. 얼굴이야 화영이 빼어났다. 그럼에도 화영을 진하게 그리워하는 것도, 마음에 깊이 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가 무얼까? 영운이 내린 결론은, 윤희와 화영에 대한 감정의 차이가 선택의 주체성 여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윤희의 경우 영운이 주체로서 윤희를 선택했기 때문에 능동적이었지만, 화영의 경우 영운은 하나의 객체로서 화영의 선택을 받은 것이어서 수동적이게 마련이었다. ---「노랑나비」중에서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영운의 점퍼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학교를 출입하는 성북서 형사 ‘기러기’였다.
“얀마. 너 제정신이냐?”
철인이 영운을 보며 끼어들었다.
“이 사람 누구냐? 내가 딱 한 방에 보내불까?”
‘기러기’가 철인을 제치고 말을 이었다.
“우리한테 붙들리면 따귀 몇 대 맞고 군대 끌려가면 끝이야. 그러나 지금은 달라. 군인들이 널 잡으려고 안달이 났어. 걔들한테 붙들리면 넌 죽어. 매 맞아 골병들고, 깜방 살아.”
‘기러기’가 덜미를 놓았다.
“나 출근 중인데, 널 여기서 봤다고 서에 전화해서 형사들 풀 수밖에 없어. 빨리 먼 데로 튀어. 아주 먼 데로.” ---「두더지와 기러기」중에서
“너, 가정형편 어렵잖아? 공부 잘하지, 글 잘 쓰지…. 빨리 가족들 먹여 살릴 궁리를 해야지…, 왜 데모 배후조종을 해?”
“배후조종한 적 없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지금 홀로 남은 어머니 생각이 어떠실 것 같아? 자랑스러울까? 아들 잘 뒀다고 말이야.”
영운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았다.
“부모 얘기는 하지 마세요. 씨팔.”
영운은 스스로 놀랐다. 아니, 내 입에서 욕설이 나오다니. 조끼가 눈을 치켜떴다. ---「아버지」중에서
“예전에 말예요. 영운 씨가 편지에서 삶의 세 가지 지표에 대해 말했어요. 가난하게 산다.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산다. 그땐 깊은 뜻을 몰랐는데, 이제 알 것 같아요. 그 점, 영운 씨한테 감사드려요.”
윤희는 말을 마치고 느티나무 아래로 가 노파의 머리 손질에 매달렸다. 영운은 뒤통수나 이마 정도가 아니라 정수리를 해머로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문득 전에 원호가 한 말이 생각났다. 니가 부르나라로 가더라도 프로나라는 잊지 말기 바란다. 대학원에 가는 것으로 방향을 바꾸었음을 알린 날, 원호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럼 부르나라에서 태어나 전문성을 강조하던 윤희는 어느새 프로나라로 이민 온 것인가? 나는 프로나라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그 나라에 몸담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그 나라를 떠난 것인가? 영운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돌아섰다. 발걸음을 떼는데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이 허공을 내딛는 것만 같았다.
---「격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