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시작되었다. 아침 1교시는 스토리 라인이었다. 학생은 나를 포함해서 5명, 모두 한국 학생들이다. 나를 잘 모르지만 그래도 조금은 알아보는 듯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방송에서 일한다고 했더니, 선생님부터 반응이 크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방송사회자라고만 했고, 설명을 제대로 못해 답답했다.
2교시는 리딩 앤 언더스탠딩. 3, 4, 5교시는 일대일 수업이었다. 일대일 수업은 50분 내내 선생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해야 하니 더 힘들었다. 걱정이다. 미리미리 예습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50분씩 모두 150분 수업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다. 6교시는 스피치 클리닉이었다. 발음을 배우고 잘못된 발음을 고치는 수업이다. 선생님이 재미있고 힘이 넘친다. 내용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수업 끝나고 방에 돌아와서 숙제하다가 저녁을 먹고, 서 과장하고 학원 앞에서 잠시 바람 쐬며 대화를 했다. 이것저것 신경 써주고 도와주려고 애를 쓴다. 낮에 공강 시간에는 같이 유브이UV대학 매점에 가서 커피도 한 잔 마셨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학생들이 무척 많았다. 방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망고 하나 깎아 먹고 샤워를 한 다음에 줄곧 숙제와 예습을 했지만 별로 한 게 없다. 내일 수업이 걱정이다.
-수업 시작 19p
세부에 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엊그제는 안 보던 토익 시험도 보고, 예상했던 일이지만, 여전히 들리지 않는 영어에 충격도 받았다. 영어카페에서 내려 받은 문법 정리 노트를 보다가 “I think him honest”란 문장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What I want is water”란 표현도 그랬다.
이렇게 간단한 영어 표현조차 아직 자연스럽게 하지 못한다. 카사 베르데Casa Verde란 식당에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하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 처음 듣는 영어가 나와 당황했었다. 다시 한 번 얘기해 달라고 하자 조금 천천히 얘기해 주었다. 그제야 자기네는 예약을 받지 않는다. 아이티 파크IT Park 점도 마찬가지고, 오직 본점에서만 예약을 받는다는 얘기라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석 달, 지금 내 영어는 어디에 와 있는 걸까? 어학원에 일본 학생들이 많다 보니, 그들과 일본어로 얘기할 기회가 있다.
“이름이 뭡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일본어는 어디서 배웠습니까? 얼마나 배웠습니까?”
한국에서 공부했다고 하면 깜짝 놀라는 척을 하면서 굉장하다는 말을 연발한다. 그러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겸손을 떠는 게 통상 대화의 시작이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다. 기독교방송에서 ‘정재환의 행복을 찾습니다’를 진행하고 있을 때, 새벽에 영등포에 있는 학원에 가서 히라가나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일본어를 시작한 이유는 우리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일본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영어가 싫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영어가 싫으니까, 영어 안 하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것이고, 자연히 일본어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햇수로 10년. 그렇지만 일본 학생들이 얼마나 공부했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하기가 참 민망하다. 10년이나 했는데, 그것밖에 못 하느냐고 비웃을 것 같다.
-석 달, 지금 내 영어는 어디에? 72∼73p
한편으로는 영어의 늪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할 수 있는 이들이 제한적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영어를 배우느라 귀중한 낭비하고 있다는 점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낭비’라는 단어를 썼지만, 영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죽도 밥도 되지 않은 80%의 비통한 낙오자 혹은 희생자들에게 낭비라는 말은 먼지처럼 가벼울 뿐이다. 그 엄청난 시간과 정열을 일찌감치 다른 곳에 투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떤 학생은 프랑스어가 전공이지만, 대기업에 취업하려니 토익 점수 900점이 필요하다. 프랑스어 공부할 시간을 영어에 할애할 수밖에 없고, 그만큼 프랑스어 학습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다른 전공도 마찬가지다. 문학이나 심리학이나 경영학이나 실력을 쌓기 위해서는 책도 더 보고 생각도 더 많이 해야 하는데, 영어하고 씨름하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졸업하게 된다. 언젠가 학교 화장실에서 ‘아, 영어 때문에 미치겠네’하고 탄식하던 남학생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전공 공부만 열심히 하면 안 될까?’
돌이켜 보면 우리 세대는 전공이면 됐다. 물론 그때도 영어 잘하면 대우 받았지만, 전공만 열심히 해도 취직이 됐다. ‘일인일기(一人一技)’라는 말도 있었다. 누구나 한 가지씩 전문 지식 혹은 기술을 쌓자는 얘기였을 것이다. 기술자가 되든 혹은 의사, 변호사, 교사가 되든 뭐든지 한 가지 지식 혹은 기술을 습득하자,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자, 뭐 그런 얘기였다. 간단히 얘기하면 ‘일인일기’만으로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21세기는 20세기와는 좀 다른 세상이 됐다.
지구촌 내 지역 간 교류가 동서남북 사방팔방으로 왕성하고, 교류의 수단으로서 외국어가 필요하므로 일인일기에 일어를 더해야 한다. 한 사람이 한 가지씩 외국어를 하는 것이 좋다. 21세기는 일인일어(一人一語)의 시대다. 현실적으로 영어의 통용이 막강한 만큼 영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가장 많겠지만, 영어를 의무로 해서도 안 되고 강제할 필요도 없다. 자유롭게 배우고 싶은 외국어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이 만들어져야 글로벌 세상에 제대로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영어 일변도의 외국어 학습 풍토에서 벗어나 중국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아랍어, 베트남어, 필리핀어, 인도어, 스페인어 등등 다양한 외국어를 자유롭게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습득한 외국어 실력으로 대학도 가고, 취직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영어 하나만이 아니고 여러 외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세계와 소통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점을 삼척동자도 알 것이다.
진정한 세계화를 위해서라면 영어의 함정에서 빠져나와 일인일어의 넓은 바다로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일인일어 역시 필수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선택이어야 한다.
-일인일어一人一語의 시대 91∼92p
우기답게 열흘 동안 비가 내렸다. 지루한 장마 같은 날씨가 계속 되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 탓에 햇빛 보기도 힘들었지만, 날은 선선했다. 에어컨을 틀일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일상처럼 퍼붓던 비가 거짓말처럼 멈췄고, 맑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을 보니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 벌써 3주가 지났고, 한동안 새 생활에 적응하느라고 분주해 글을 쓸 시간도 여유도 없었던 것 같다.
현재 하루 8교시 수업을 수강하고 있다. 아침 8시 50분 2교시부터 시작되는 내 일과는 오전 3교시, 오후 3교시, 저녁 식사 후 2교시로 진행되는데 7시 20분에 끝난다. 8교시 중 일대일 수업 4교시, 그룹 수업 4교시다. 일대일 수업은 필리핀 교사 2, 원어민 교사 2이다. 에이이엘시에는 원어민 교사가 많다. 일대일 수업에서 나를 담당하고 있는 교사는 미국인 마이크Mike와 영국인 필Phil이다. 원어민 일대일 수업은 여기 와서 처음 경험하는 것이지만, 한 사람은 미국인, 한 사람은 영국인이어서 느낌도 좀 다르다.
마이크는 미국 해군 출신으로 내 또래다. 수업 시작 첫 주에 알(r) 발음과 엘(l) 발음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면서 알을 발음할 때는 마치 여성과 입맞춤을 할 때처럼 입술을 앞으로 쑥 내밀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동안 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고, 연습하고 있었지만 잘 되지 않았었는데, 마이크의 설명대로 하니 입과 혀가 쉽게 움직여 주었다.
이런 게 원어민 교사에게 얻을 수 있는 이점 중 하나일까? 필은 58세다. 캠브리지 출신이고, 전공은 수학이지만, 오랫동안 영어 교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한 경험이 풍부하다. 무엇보다 문법과 발음에 정통하고 열정적이다. 필은 특히 발음을 강조한다. 정확한 발음, 연음, 인토네이션 등등 꼼꼼하게 점검하고 지적한다. 수업시간에 좀 힘들기도 하지만, 많이 배운다는 느낌이 든다. 필은 또 강조한다. 영어를 말할 때 한국어로 생각한 다음, 그걸 영어로 번역해서 말하면 늦는다고. 영어로 바로 말해야 한다고. 그러고 싶지만 그게 말처럼 되나?
-에이이엘시의 수업 217∼218p
영어가 잘 안 되는 이유가 뭘까? 1년 4개월 만에 영어가 된다면 영어 못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얘기도 하지만, 안 되니까 속상한 게 사실이다. 오십대에 영어를 시작한 것 자체가 무리였을까? 나이가 들면 기억력도 나빠지고, 공부 머리도 둔해지고, 특히 외국어는 더더욱 하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과연 이게 문제였을까?
어학원에서 만난 대학생들은 젊고 재기가 있었다. 한창 공부할 때라 그런지 두뇌 회전도 빠르다. 영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도 나이 든 사람들보다는 유연해 보였다. 어릴 때부터 미국 영화, 드라마 등을 경험하면서 성장한 것도 영어와 영어 문화에 접근하기 쉬운 한 요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영어 실력이 초고속으로 느는 것은 아니었다. 더러는 진도가 빠른 학생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솔직히 저쪽에 있을 때도 생각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지만,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첫째, 한국인에게 영어는 근본적으로 배우기 어려운 언어라는 점이다. 영어는 아주 이질적인 언어다. 두 언어는 순서가 다르다.
한국어에서는 주어 다음에 목적어가 나오지만(나는 빵을 좋아한다), 영어에서는 주어 다음에 서술어가 나온다(I like bread). ‘그게 뭐 그렇게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문이 짧아서 그렇지 길어지면 무지하게 어렵다.
한국어에서 순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영어에서 순서는 절대적이다. “나는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사랑한다”라는 문장을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이라고 해도 한국어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영어는 순서가 중요하다.
-영어 공부 누가 어떻게 해야 할까 279∼280p
_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