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을 젖혔다. 스콜이라도 오려는지 창밖이 어두웠다. 번갯불이 번쩍거리더니 강한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다. 온통 암흑이었다. 김민재는 침대를 빠져나와 칫솔을 입에 물었다. 텁텁한 입이라도 헹궈낼 참이었다. 거울을 보았다. 하룻밤 새 턱수염이 제법 자라 산적이 따로 없었다. 세이빙 비누를 턱에 골고루 바르고 면도날로 턱을 밀었다. 속살이 하얗게 드러났다. 겨우 며칠 지났는데 얼굴이 까맣게 타다니…, 한국 사람이라며 까만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붙이던 차상철이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차상철은 김민재의 표정을 살폈다. 며칠 전 공항에서 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수룩해 보였지만, 그나마 당당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때보다 더 어둡고 지쳐 보였다. 한국사람들이 뉴델리로 오는 경우는 여행이나 출장이 많은데 대부분 중소기업 중견 간부나 직원들이었다. 남쪽 첸나이나 서쪽의 뭄바이 쪽은 대기업 직원도 더러 있다는 소문은 들어도 뉴델리에는 드물었다. 더군다나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범죄를 저지를 만한 사람 같지 않았다.
미제 사건…. 살해사건 용의자가 지금에야 나타나다니…. 10년이나 숨어 완전 범죄를 꿈꾸다니…. 지독한 놈이었다.
서울 경찰청 외사부로 처음 정보가 입수되었을 때 경찰청 외사부 직원들은 황당해했다. 인도 뉴델리 인디라간디국제공항에서 용의자를 보았다는 제보가 있었기 때문인데, 정치범이나, 경제 사범도 아니었다. 게다가 오래된 미제사건 중 한 건일 뿐이어서 여론의 관심을 가질만한 사건도 아니었다.
정규태는 용의자 한태일을 생각해봤다. 그는 왜 아내를 살해했을까. 게다가 시체를 깊은 산속에 유기하고 해외로 도피했을까. 용의자를 체포해봐야 알겠지만, 보험금이 노린 범행이라 유추할 수 있었다. 국과수의 시체 분석 결과 성폭행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한태일은 이미 자살해 사망신고까지 끝났다. 그의 알리바이를 깨지 못하면 사건은 또다시 미궁으로 빠지게 된다. 어쨌든, 8년 동안 인도에서 감쪽같이 숨어 살았다니…. 인도라서 가능했을지도 몰랐다. 중국이었다면 어떤 경로를 통하더라도 꼬리가 잡혔을 것이다. 아무튼, 8년 전에도 그의 알리바이를 깨뜨리지 못해 풀어 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일까. 게스트하우스에 투숙은 했는데, 도무지 여행 일정을 잡지 않았다. 쉬는 날은 가까운 델리라도 다녀오면 좋을 텐데, 객실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았고, 평일에는 늦게 들어왔다. 내일은 토요일인데 거래처와 회의가 있다고 출근해야 한단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었다. 여권 사본만으로 정규태의 직업을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나라를 방문했는지 기록이라도 볼 수 있으면 감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는 객실 예약을 취소한 적이 있어 차상철은 그의 여권을 요청했다. 복사를 하면서 그의 여권 기록을 훔쳐볼 생각이었다. 정보를 확보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거절했다.
뉴델리 하늘은 늘 뿌옇다. 매일 보는 하늘이지만 오늘따라 더 뿌옇게 보였다. 사람들이 붐벼서일 것이다. 프레첸 힌두사원의 첨탑도 오늘따라 더욱 회색으로 보였다. 안타까웠다. 코넛플레이스 로터리에는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먹지 못해 배가 고파도 힌두 신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번 생에서 행한 만큼 내세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힌두 신들에게 감사하는 축재에 참석하는 이유다. 일거리가 많으면 길거리를 배회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것이다. 인간이란 동물과 같아서 배가 고프면 맹수가 된다. 그래서 먹여놓아야 조용해진다. 그리고 먹으려면 돈을 벌어야 하는데, 일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아도 일거리가 없으니 축제 준비라도 해야 힌두 신들에게 축복을 받을 거라 여긴다. 대부분의 관공서나 회사도 축제 기간에는 쉬지만, 샌지 쿠마르 굽타는 그럴 수 없었다. 폴리스 스테이션에 출근하거나 인디라간디국제공항에 잠복근무해야 한다. 아무리 국제공조로 수사를 한다 해도 모두가 쉬는데 출근을 하려니 샌지 쿠마르 굽타는 짜증이 났다.
차상철은 만들다 만 종이 탈을 바라보았다. 입도 크고 눈도 부리부리했다. 큰 코는 삐뚤어져 흉측했지만, 어디로 보나 인간이었다. 인간을 닮은 신, 신은 왜 인간을 닮았을까. 태초에 신도 인간처럼 생겼을까. 차상철은 궁금했다. 아무튼, 두세라 축제 전까지는 마무리해야 마지막 날 마히사수라 탈을 태워버릴 수 있다. 그래야 바라나시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 아니 공존하는 곳. 바라나시 갠지스강, 정규태의 정체를 알아내 그를 제압하고 싶었다. 그리고 두르가 신처럼 승리자가 되어 자축하고 싶었다.
정규태는 옆자리를 흘깃 보았다. 수갑을 찬 용의자 한태일이 졸고 있었다. 그는 안쓰러울 정도로 지쳐 보였다. 한태일은 어머니에게 버려졌다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끊임없는 의심으로 인한 비행과 살인, 사람을 믿지 못한 삶이 그를 어둠에 가뒀다. 어쩌면 졸고 있는 이 순간이 한태일이 그의 의심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순간이 아닐까…. 믿는다는 것 누구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은 타협하면서 믿으려고 노력한다.
--- 본문 중에서
나는 방송사의 추적 프로그램을 통해 우연히 보험설계사 박정숙(가명) 살해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갠지스강 강가의 바라나시를 떠올리게 되었다. 바라나시는 죽음으로 통하는 길목(인도사람들은 구원이라고 한다)이다. 고집스러운 염소들과 삐쩍 마른 소들이 도로를 점령하는 더러운 도시, 하루 한 끼도 못 먹어 가죽만 남은 걸인들이 득실거리는 도시, 어느 누구도 간섭하려 하지 않고 간섭받지도 않는다. 인도사람들은 성스러운 곳이라지만, 내가 본 바라나시는 범인들이 숨어 살기에 적합하고 은닉시켜줄 수 있는 최고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까지 무사히 탈출할 수 있다면, 아무리 뛰어난 수사관이라도 용의자를 쉽게 검거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