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우중충한 목소리가 이승에 혼자 남아 꿈틀거린다고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져요. 옷이든 사진이든 뭐든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저승사자를 따라가려 했던 내 다짐에 찬물을 끼얹었어요, 그 녹음기가.
“녹음은 집어치울 수 없남” --- p.57
집은 예전 그대로인데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신기할 지경입니다. 부엌의 아궁이처럼 붙박이로 눌러앉아 흘려보낸 칠십여 년의 세월을 누군가가 땅 깊숙이 묻어버린 것만 같아요. 홀로 질긴 시간을 견디고 있으면 이 원당리 집이 생생한 소리로 팽팽했던 시절이 무척 그리워집니다. 만약 조물주가 어디로 가고 싶으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없이 뱃사람들의 밥을 챙겨주던 시절이라고 말할 겁니다. --- p.89
우리 집에는 온갖 소리가 살아 있습니다. 과거의 소리 말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 옛날 우리 집에 떠돌던 웃음소리, 말소리, 울음소리, 호통 소리를 듣습니다. 그런 기분 좋은 환청에 젖어 있으면 혼자 살고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큰방, 작은방, 골방, 마루, 광, 부엌, 마당, 지붕, 텃밭이 옛날 그대로 있는데 내가 이 집을 버리고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이가 입술 없이 살 수 있어요? --- p.128
그 외로움은 비단 혼자 살기 때문에 우러나오는 감정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집에 식구가 바글바글할 때도, 경로당 친구들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눌 적에도 곧잘 쓸쓸한 기분에 젖어 드니까요. 태생적으로 늙음은 고독과 한 쌍인가 봅니다. 바늘과 실처럼 말이에요. --- p.130
기억은 뽑아내면 어느새 돋아나 있는 무덤의 잡초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파래지는. --- p.135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있을 상주에게 저녁밥을 먹여야 하나 어쩌나 망설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비둘기 울음소리가 들려요. 가만히 귀 기울여보니 그건 작은방 쪽에서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작은방으로 가만가만 걸어갔습니다. 작은방이 가까워질수록 명치께가 시렸습니다. 그 비둘기 울음소리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건 비둘기가 아니라 마은숙이 내는 소리였습니다. --- p.154
시어머니를 깍듯이 모시면서도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살았어요. 이 ‘거리 두기’는 비단 시어머니한테만 향한 게 아니었습니다. 시댁 식구 모두에게 그런 경계선이 자연스레 그어졌기에 나는 최씨 집안의 큰며느리면서도 타인 같은 기분으로 매일 아침을 맞았습니다. 시댁에서 꾸준히 앓은 그 향수병 비슷한 지병은 말할 것도 없이 남편의 무관심이 싹틔운 겁니다. --- p.158
나는 글을 쓸 때 젊음을 만끽했습니다. 머리를 염색하거나 화사한 옷을 걸치거나 화장으로 검버섯을 감출 때가 아니라, 반듯한 문장들이 내 손에서 흘러나오는 순간에 나이를 까맣게 잊곤 했지요. --- p.163
대청마루를 닦고 또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남편의 그림자. 부부라는 끈으로 묶여 있기 때문에 보이고 느끼는,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을 미더운 환영이었습니다. 남편의 그림자는 자나 깨나 내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녔습니다. --- p.166
“(…) 그 무렵 매고 씨 얘기를 자주 했어요. 이승에서 부녀지간으로 맺어진 사인데 한 번도 같이 산에 오르지 못해서 한스럽다고요. 산에 죄를 짓고 가는 기분이래요.”
“먹이고 가르치지 못해서 한스러운 게 아니라 같이 산에 오르지 못해서 한스럽대요?”
몸을 옆으로 틀면서 마은숙이 발끈했어요. --- p.199
망자의 옷가지와 함께 이 물건도 불태워달라는 분노가 얼굴에 가득했는데도, 마은숙의 손은 어느새 원고 뭉치를 챙기고 있었어요. 그게 애물단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p.200
볕 좋은 아침, 텃밭에 쭈그리고 앉아 달래를 캐는데 ‘첫사랑의 감정이 이럴까’라는 생각이 삐쭉 돋아납디다. 나는 부모한테 떠밀려 족두리를 썼기 때문에 첫사랑이랄지 연애의 감정을 잘 몰라요. 게다가 남편이 바깥으로 나돌아서 그런 달달한 감정이 움트지 않았습니다. 어쨌거나 나는 저승을 눈앞에 둔 나이에 마은숙을 만나 첫사랑, 그 밤하늘의 불꽃놀이 같은 귀한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행운이지요.
--- p.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