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십대의 탄생』이 출판된 후 시간이 많이 흘렀다. 물론 나도 더 이상 십대가 아니게 되었다. ‘다른 십대’를 자칭할 때는 남들과 다르게 살아도 당당하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을 담았는데, 정말로 말이 씨가 되었나 보다. 그 후로 내 시간은 나조차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샛길로 빠졌고, 그렇게 중구난방 튀어 다니는 와중에 용케 공부는 계속했다. 이런 동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른 이십대의 탄생’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다. 탄생은 한 번이면 족하다. 다르게 살고자 하여 다른 길에 오르면, 단지 자기 자신의 미숙함을 마주하게 된다. 세상에 배울 것투성이다. 공부를 계속 했던 것은 내 철저한 생존본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 p.4
나처럼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을 ‘홈스쿨러’(Home-Schooler)라고 부른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 공교육의 한계가 확연해지고 학교 밖 여러 교육환경이 조성되면서 홈스쿨러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홈스쿨러가 아니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 집에 앉아서 공부를 한 기억이 없다고 농담을 하곤 한다.) 내가 홈스쿨러라는 명칭을 원치 않는 이유는, 학교를 나와 놓고 또 집(Home)에서 학교(School)를 다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그늘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학교에서 할 수 없는 좋은 경험은 경험대로 하고 또 한편에서 입시공부는 공부대로 하는 것. 나는 그런 삶을 원했던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중졸 백수’라는 새로운 명칭을 택했다. 피보호자도, 학생도, 예비취업생도 아닌 백수! 학교와 가족을 전부 벗어나서 내 갈 길 가고 싶고 홀로 서고 싶다는, 어찌 보면 참 철없고 맹랑한 바람이 여기에 담겨 있다. --- p.14
백수 케포이에 온 사람들은 그날부터 전부 ‘백수’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반적인 백수의 이미지대로 파란 추리닝을 입고 컵라면을 먹으며 골방에서 뒹굴거리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들 그전까지는 나름대로 직업이 있었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었으며, 케포이필리아에서 백수 등록을 한 뒤에도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도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어린 십대인 나부터 시작해서 사십대 초반의 주부까지 있었다. 어쩌면 평생 만나지도 못했을 다양한 사람들이 ‘백수’라는 이름하에 모였던 것이다. 백수들은 매주 『임꺽정』을 한 권씩 읽었고, 케포이 시간 전에 미리 조별로 만나서 보조자료를 만들었다. 또 다른 날엔 『임꺽정』 연극 연습을 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이와 신분의 차이는 관계를 맺고 함께 활동하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함께 세미나를 하고 발제를 준비하고 산책을 가면서, 나는 점점 내 나이를 잊게 되었다. 내 나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나이도 잊었다. 중졸, 주부, 과외 선생, 우체부, 상담원, 영화감독이 스스럼없이 어울려서 책을 읽고 산책을 가고 연극을 했다. --- p.26
그러나 은행원이 나에게 한 말은 단 한 마디였다. 엄마를 데려오세요!” 돈을 뽑기 위해 들고 간 통장은 도장이 없기 때문에 무용지물이었다. 미성년자가 돈을 뽑을 때는 사인을 사용할 수 없고 반드시 도장을 써야 한단다. 또한 미성년자가 카드 재발급을 받거나 통장을 ATM에서도 쓸 수 있도록 등록할 때도 전부 보호자가 필요하단다. 도장은 이사 통에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부모님은 머나먼(?) 충청도에 계셨다, 그것도 차를 타고 20분은 달려야 겨우 ‘농협’이 나타나는 산골짜기에. 통사정을 해보았지만 은행원은 울상을 지으며 단호하게 ‘NO’로 일관했다. 미성년자 관련 보호규정이야 원래 복잡하다지만, 그래도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체크카드를 겨우 ‘재발급’하는 데도 보호자가 필요하다니, 정말 ‘애’ 취급이다. --- p.120
내 자발적 힘으로는 어려운 철학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글 쓰는 작업은 언제나 괴롭기만 했고 철학책을 읽는 것은 다 큰 어른들이나 하는 공부인 줄로만 알았다. 이토록 게으른 내가 지금 이렇게 ‘철학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 덕분이다. 철학공부는 싫었지만 선생님은 좋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을 만날 구실이 사라질 테고, 결국 글을 쓰는 것만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공부를 하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선생님은 나의 배움의 과정에 일절 참여하지 않으셨다. 선생님은 나와 책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도록 늘 한 발짝 떨어진 곳에 서 계셨다. 그러나 내가 책과의 관계를 멀리하려 하는 순간, 선생님은 죽비로 머리를 후려치듯 매섭게 일갈하셨다. 그러면 나는 다시금 울상을 지으며 책을 손에 잡곤 했다.
--- p.156~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