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노동자들은 잔업을 포함해 하루 10~11시간의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고, 비좁은 셋집에서 살았으며, 권위주의적인 공장 당국의 ‘갑질’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불경기라도 닥쳐오면 정리해고를 당하는 게 수순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러시아의 준주변부적 자본주의는 그야말로 지옥이었어요. 한번 노동자가 된 이상 그들에게는 신분 상승의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며, 집안에 고등학교(김나지움)나 대학 입학에 필요한 사교육을 시킬 만한 돈이 없는 이상 아이들도 평생 세습 노동자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장시간의 고강도 노동, 하우스 푸어로서의 고달픈 삶, 회사의 ‘갑질’, 신분 불안, 가난과 중노동의 대물림……. 이 모든 게 오늘날 대한민국 상황에 대한 간추린 묘사처럼 들리지 않는지요?
레닌은 이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지옥과 같은 조건에서 노동을 팔지 않아도 되는 새로운 사회, 즉 사회주의의 비전을 제시했습니다. 트로츠키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상실돼가는 민주성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려 했습니다. 스탈린은 국가 주도 개발의 붐 속에서 신분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각각의 시기와 상황에 따라 노동자들 일부는 레닌을, 트로츠키를, 또 스탈린을 따르기도 했지요. 스탈린이 건설한 사회는 혁명이 내걸었던 애당초의 약속에 비해 훨씬 보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p.7
레닌은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급진적 혁명가이자 사상가입니다. 자본가와 전쟁의 관계, 평화운동의 모순, 전쟁과 식민지 문제에 있어서 온건 사민주의자의 위선 등에 대한 그의 분석은 지금도 참조할 만하지요. 하지만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그가 선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논리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많아요. 당시의 러시아는 충분히 혁명이 일어날 만한 나라였고, 레닌에게는 이를 조직해낼 지도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물적이라고 할 법한 정치 감각으로 이런 선택을 했고, 이는 당대 러시아의 현실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어요. 하지만 혁명기를 거쳐 시작된 새로운 국가 건설 사업은, 분명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레닌의 ‘무장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 건설’ 등식을 대치할 만한 대안은 무엇일까요? 뚜렷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이상적인 대안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아주 격렬하지만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반항 정도일 겁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총파업 노선처럼 민중들이 위계질서를 가진 폭력 조직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경우겠지요. 하지만 동시다발적인 세계적 총파업은 쉽게 조직되는 게 아닙니다. 인터넷이 전 세계에 보급되면서 여러 나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반전 평화 시위를 하기도 하니, 민중들이 서로 보조를 맞추는 게 예전보다는 수월해졌지만요. 레닌이 꺼내든 잔혹한 수단이나 내재적으로 너무나 문제가 많은 메커니즘인 ‘국가’에 호소하지 않으면서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까. 이것이 앞으로 우리가 찾아나가야 할 과제일 겁니다. --- p.70~71
우리는 트로츠키를 역사적 패배자로 봐야 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소련이 몰락한 뒤, 한국에서는 소련의 사회주의를 따르겠다는 명분이 사라지면서 그 틈새를 주사파가 파고듭니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스탈린의 폭정이 널리 알려지면서 그렇잖아도 관료화되었던 공산당들의 활동이 위축되지요. 하지만 서유럽을 중심으로 민족과 국민이라는 개념에 아랑곳하지 않았던 트로츠키가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나갑니다. 군사 공격이 잦아지고 세계 체제가 크게 흔들리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서 트로츠키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 거예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레닌이나 스탈린보다 생명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구미권 트로츠키주의 세력들의 분열 경향과 교조주의, 노동계급 사이에서의 대중성 부족 등은 문제였지만요. --- p.106
소련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주의는 정치 영역의 존재를 기본 전제로 삼습니다. 국민 모두가 정치의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활동을 펼치며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하지요. 물론 이는 선진화된 부르주아 사회에서도 어려운 일이지만요. 1927년까지의 소련에는 그나마 제한적인 정치 영역이 남아 있었지만, 이후로는 모두 사라져버렸습니다. 지하 서클 정도만 그나마 남아 있었지요. 지하에서 활동한 이들은 대부분 혁명이 배반당했으며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 국가에 의해 잠식되고 그나마 남은 정치는 모두 지하화되었던 1980년대의 남한과도 유사한 상황이었지요. 소련의 지하에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찾자는 공산주의의 붐이 일었던 것처럼 남한의 지하에서는 소련이라는 붐이 일었던 것이고요. ---p.152
스탈린 체제는 분명 억압적이었지만, 제정러시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민 포섭 능력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체제에 포섭된 대중들은 억압을 느꼈지만, 그에 대한 불만을 정치적으로 표출할 수 없었어요. 결국 스탈린 치하의 소련 체제는 사회주의라기보다는 대민 포섭 능력이 뛰어나면서 고속 압축적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다누이의 비(非)시장적 개발주의로 규정하는 게 정확할 겁니다. ---p.161
공산주의 운동의 혁명적 동력이 20세기 아시아의 모습을 완전히 바꾼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잠재적 가능성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공산 혁명이 아시아에 뚜렷한 영향을 미친 것은 공산주의 운동의 국제적 성격과 연관될 거예요. 공산주의 운동은 세계적인 혁명 프로젝트를 추진하려 했고, 그만큼 민중을 동원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급진적인 구호와 정책을 함께 제시했던 겁니다. ---p.242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혁명을 경험한 주변부와 준주변부의 특수한 개발 형태입니다. 그런데 관료들이 개발을 주도하다 보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자본가로 변모하기 때문에 이 형태가 지속되기는 어려워요. 집권 세력의 입장서는 사적 소유권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를 오래 견딜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적색 개발주의는 길어야 70-80년 정도 되는 제한된 시기에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시장적인 적색 개발주의는 사회주이라는 간판을 내걸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가 생각했던 사회주의로 나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회주의를 원하던 이들은 체제 밖으로 내쳐지면서 상당수는 도륙을 당하지요. 집권 관료들은 사회주의라는 간판은 보존하지만 실제로는 경제개발을 해나가고요. 이 과정에서 사회의 일부 계층, 특히 농민들은 상당한 착취를 당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업 대신 개발의 주체로 나서면서 중앙집권적 통제가 이뤄질 때는 투자 효율성이 높고 개발 속도도 빠릅니다. 또한 과거의 공동체가 도시에 재현되면서 민중들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민중들 역시 이런 체제를 열렬히 반기고요. 기본적으로는 다수의 동의 기반을 확보한 체제로 봐야 할 거예요.
---p.272~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