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이다.
1995년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출간되면서 그의 ‘똘레랑스론’이 한국 사회에서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을 얻게 되었다. (홍세화는 최근 2000년에 출간했던 '왜 똘레랑스인가'(필리프 사시에 지음, 상형문자, 2000)을 '민주주의의 무기, 똘레랑스'(이상북스, 2010)라는 제목으로 직접 번역하여 다시 펴내며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에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90년대 중반 한국 사회에 혜성같이 등장해 대중화되었던 “똘레랑스” 담론이 어쩌면 당시 막 자리 잡고 있었던 새로운 자유주의적 통치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를 특징짓던 “전쟁 담론”의 빈 공간을 메우며 진보주의자들의 언어로 자리 잡았던 “똘레랑스”는, 어쩌면 사회의 보편적 적대를 부인하는 동시에 이러한 적대를 전면에 내세우는 급진적 담론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던 자유주의적 통치와 일종의 공모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 p.337
*저자는 푸코의 방법론에 따라, ‘관용’ 담론의 계보학을 추적한다.
종교개혁 이후 존 로크의 관용론
“서구 사회에서 통치의 원리로서의 관용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5~16세기 이단자의 처우와 관련해서였다.…물론 자유주의적 관용의 기원이라고 할 만한 여러 원칙들이 등장한 시기는, 르네상스 시기보다는 종교개혁 시기라고 할 수 있다.…종교개혁 이후 가장 대중적으로 관용의 원리를 정식화한 사람은, 다름 아닌 존 로크였다. 로크는 1689년 영국의 왕위 계승자를 둘러싸고 종교 간의 논쟁이 한창 벌어지던 당시, '관용에 관한 편지'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다.…이 '편지'에서 로크는 단지 관용을 호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치사회와 종교적 삶을 구분할 것을 주장하였다.
…로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그러므로 자기 영혼을 돌보는 일은 각자에게 달려 있으며, 각자에게 맡겨져야 한다.”(405) 이러한 선언은, 장차 근대성의 상징이 될 개인적이고 사적인 신앙인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공동체 내의 다양한 믿음들은, 이제 그 믿음이 어떤 공적 중요성도 없음이 인정되는 경우에 한해서만,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있다. --- pp.66-69
볼테르의 '관용론'
18세기 초반 프랑스의 계몽주의자였던 볼테르는 신교와 가톨릭교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당시 상황에서 벌어진 한 신교도 가장(칼라스)의 억울한 죽음에 분노하였다. 종교적 편견에 의해 조작된 칼라스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마음먹은 볼테르는 이 책을 통해 광신과 편견에 의한 진실의 왜곡, 무자비한 고문, 사형 등 야만적 형벌 제도를 강하게 비판하고, 동서양의 역사와 성서 등을 뒤져 불관용에 대한 반론의 논거를 구체적으로 찾아나간다. 그는 불관용의 폐해를 지적하며 인도주의의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개인의 양심과 믿음에 기반한 신앙에 대한 관용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한 세기 전 로크의 주장과 볼테르의 관점은 일맥상통한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의 관용 담론
“최근 들어 다문화주의 관용 담론이 부흥하면서, 개인보다는 집단에 기반한 관용 개념―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특정한 집단에 귀속된 개인에 대한 관용 개념―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 같다.…근대 초기, 종교적 이견이나 양심의 자유에 적용되었던 관용은, 이제는 종족?인종?민족?섹슈얼리티의 문제 등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관용이 종교적 믿음이나 타인의 신념에 적용되었던 시기, 즉 관용이 믿음을 사사(私事)화함으로써 국가 권력을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을 때의 관용은, 종교 및 양심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권리라는 평등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근대 유럽 역사에서, 관용은 종교의 자유와 치환 가능한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평등의 조건으로 정식화한 도덕적 자율성과도 별 문제없이 수렴해 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관용은 평등과 동의어는 아니었으며, 종교 간의 실질적인 평등을 목표로 삼지도 않았다.) 그런데 관용의 대상이 특정한 속성을 갖춘 개인들이나 사회적으로 주변화된 정체성들로 변하게 되면,…관용은 평등에 대한 자유주의적 실천의 한계를 은폐하고 그것을 보충하면서, (스스로를 완벽한 것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자유주의적 평등을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 pp.72-75
*다문화시대에 관용론이 갖는 정치적 효과를 면밀히 분석한다.
관용은 갈등과 불평등을 포장하고 관리하는 대표적인 ‘탈정치화’ 기제로 기능한다.
관용은 차이와 정체성을 존재론의 수준으로 물화하고, 극복할 수 없는 사회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여,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구조적 원인을 은폐한다. 또한 차이에 대한 묵인과 갈등 그리고 적대행위의 회피를 유일한 대안으로 보며, 기존의 체제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관용은 필연적으로 운동을 침묵시키며 실질적인 도전과 저항을 방해한다.
위기에 처한 국가 권력을 강화하고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오늘날 관용 담론은…국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고 국가 권력을 확장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현대 국가는 한편으로는 세계화로 인한 주권의 약화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표방해 왔던 보편성의 위기로 인해 곤란에 처해 있는데, 관용 담론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강화시키고 정당화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 p.142
관용은 중동과 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와 유럽의 적대행위를 정당화한다.
“관용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오늘날 국제적인 차원에서 서구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담론으로 기능한다.…관용을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하고 비자유주의 체제를 근본주의와 동일시하는 담론은, 결과적으로 서구의 도덕적 우위와 비(非)서구에 대한 서구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결국 서구를 문명의 편에서 “불관용”을 규제할 수 있는 전도사로 만들고, 이는 현재 해방(liberation)이라는 미명 하에 자행되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런 식으로 관용은 어느새 21세기 서구 제국을 정당화하는 핵심적인 용어가 되었다.” --- p.77
미국 사회의 생생한 사례들을 통해 관용의 기만적 효과를 폭로한다.
“지난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이 추구하는) “관용의 승리”라는 이름하에 찬양되었고, 이어서 오바마가 자신의 취임식 기도를 동성애에 반대해 온 복음주의 목사와 동성애자 가톨릭 신부에게 동시에 맡긴 것 역시, “관용의 표현”이란 이름으로 옹호되었다. 첫 번째 사례에서 사람들이 관용의 이름으로 흑인의 종속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흑인들은 이 승리를 관용한 백인들의 미국에 다시 종속된다. 두 번째 사례는 편견의 관용과 동성애자를 향한 관용을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시민권에 관한 복잡한 정치적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 p.9
“유엔 회의장이나 국제 인권 운동 속에서, 관용은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로 언급된다. 유럽에서, 관용은 제3세계 이민자들과 집시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유대인과의 갈등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이자, 발칸 반도 분쟁의 해결책으로 각광받고 있다. 미국에서, 관용은 다양한 인종의 이웃들을 한데 묶어주고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게 해 주는 방책이자, 군대 같은 조직의 동성애 혐오에 대한 적절한 처방전, 그리고 늘어만 가는 증오 범죄에 대한 해독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관용은 2000년 미 대선에서 민주당 부통령 후보이자 독실한 유대교인이었던 리버만(Joseph Lieberman) 지지자들이 내건 슬로건이었으며, 조지 W. 부시가 개인의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행정부 각료를 선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 p.19
“이곳은 일단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장소로, 벽에는 〈책임지기〉라는 제목을 단 거대한 열 개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여성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여성들의 “밤길 되찾기” 시위, “관용 깃발”을 만들고 있는 초등학생들, 반反유대주의적 폭력에 항의하는 몬태나 주의 시위, 노숙자 지원 캠페인, 세자르 차베스를 기념하는 법정 공휴일 지정, KKK단에 맞서 관용 기금을 모금하는 “레모네이드 프로젝트”, 분쟁지역의 청소년들을 후원하는 “평화의 씨앗”, 유대인과 흑인을 연결시켜주는 프로그램인 “이해하기”, 1990년 미국의 장애인법 제정,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안네 프랑크와 보스니아 내전 생존자인 즐라타 필리포비치(ZlataFilipovic)에 대해 배우는 롱비치 고등학생들의 모습.” --- pp.213-214
*푸코의 ‘통치성’과 데리다의 ‘대리보충’ 개념을 빌어 관용의 실체와 정치철학적 함의를 드러낸다.
“오늘날 관용은 법과 완전히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법적인 담론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또한 관용은 오직 특수한 경우에만 강제적 명령으로 전환되는 국가의 담화인 동시에, 학교?교회?시민단체?일상적 대화 속에서 순환하는 대중 담론이기도 하다. 관용의 이러한 특징들은 푸코의 ‘통치’(government)에 대한 설명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푸코에 따르면, 통치는 “사람들에게 법을 부과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물들을 배치하는 문제, 즉 법보다는 전술들(tactics)을 적용하는 문제이고, 나아가 법 자체도 전술로서 활용하는 문제”이다. --- p.136
“관용은 위협적인 내부의 타자를 편입시키고 규제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데리다가 이야기한 대리보충(supplement)의 지위를 점한다.―데리다에 따르면, 대리보충은 동일성과 차이, 내부와 외부라는 이분법을 개념적으로 잠식하는 동시에, 지배적 용어의 연속성과 통합성, 자기-완결성에 중요한 역할을 행하는 요소이다.” --- p.61
“관용은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서 등장한다. 대리보충으로서의 관용은 다방면에서 평등을 보충하고 대리하며, 무엇보다도 평등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진정한”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순간 개입하여, 교묘하게 평등의 불완전성을 보완한다.“ --- p.125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다니 무척 기쁘다. 이 책은 주로 유럽과 북미에서의 관용 담론의 부흥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아마 한국 독자들의 관심도 끌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의 목적은 관용의 실천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데 있지 않다. 대신에 이 책은 관용 담론이, 좀 더 실질적인 권력의 산물로 이해되어야 하는 각종 불평등과 갈등을 어떻게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관리하는지, 또한 이슬람 주민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적대 행위와 중동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착취를 어떻게 정당화하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비록 이 책의 내용이 유럽-북미 지역에 한정되어 있지만, 관용이 헤게모니 언어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이 책의 분석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관용을 악랄한 방식으로 활용한 조지 W. 부시의 재임기에 쓰여졌다. 하지만 이 책의 일반적인 주장은, 지난 세기 후반에 일어난 관용 담론의 부흥이라는, 좀 더 장기적이고 광범위하며 정치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이 책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부분은,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이 관용을 다양한 갈등과 차별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담론으로 차용한 방식과, 그 결과 관용이라는 진정제가 어떻게 권력과 지배에 대한 실질적인 도전을 방해하고, 전치(displace)시켰는지에 관한 것이다. 오늘날 보편성의 기치 아래 불평등을 비판했던 맑스주의와 자유주의의 목소리는 점차 잦아들고, 이제 통약 불가능한 사회적 차이―인종적, 종족적, 성적 차이들―를 긍정하는 목소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부활한 관용 담론의 일차적인 기능은, 이러한 새로운 정치학이 가진 지적?정치적 잠재력을 제약하고 왜곡하는 데 있다.
사회적 차이의 가변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각종 이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실제 정치적 삶에서 차이는 거의 존재론적 차이의 수준까지 물화(reify)되고 있다. 오늘날 관용이 차이의 윤리적 중개인이자 해결책으로 격상된 것은, 이러한 차이의 물화를 배경으로 한다. (알다시피, 관용 담론은 특정한 차이를 “문제”로 만드는 규범적이고 물질적인 힘의 작동에 대해선 아무런 설명이 없다.) 따라서 관용에 기반한 다문화주의 담론의 아이러니는, 이 담론이 본질화된 정체성에 문제 제기하기보다는 정체성을 한층 더 자연화하며, 나아가 차이 자체를 적대 행위와 혐오감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이러한 차이의 자연화와 존재론화에서, 편견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는 기술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오늘날 관용은 차이를 그저 묵인하면서 이를 향한 적대 행위를 줄이고, 모든 차이를 절대적으로 동등하게 존중하는 동시에, 기존의 지배와 우월성을 안전하게 보존하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러한 관용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의 당선은 (미국이 추구하는) “관용의 승리”라는 이름하에 찬양되었고, 이어서 오바마가 자신의 취임식 기도를 동성애에 반대해 온 복음주의 목사와 동성애자 가톨릭 신부에게 동시에 맡긴 것 역시, “관용의 표현”이란 이름으로 옹호되었다. 첫 번째 사례에서 사람들이 관용의 이름으로 흑인의 종속이 끝났다고 선언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흑인들은 이 승리를 관용한 백인들의 미국에 다시 종속된다. 두 번째 사례는 편견의 관용과 동성애자를 향한 관용을 동등하게 취급하면서, 시민권에 관한 복잡한 정치적 논쟁을 야기하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사례 모두에서 관용은 불평등, 배제, 갈등을 탈정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새 정권과 함께 시작된 이 두 가지 예는, 부시 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관용 담론이 인종과 이민, 이슬람, 섹슈얼리티, 문화 등과 관련된 각종 논의 속에서 계속해서 활발히 등장할 것임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나의 주된 관심사는 자유주의 정치 담론의 공허한 약속과 정체성의 정치가 직면한 함정들, 그리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 속에 존재하는 탈(脫)민주적 힘들에 관한 것이었다. 관용 담론의 부흥에 대한 관심은, 이러한 작업의 일부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사상과 비판이론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역사가 우리 시대의 권력을 비판적으로 이해하고, 민주적 미래와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데 새로운 빛을 비춰준다고 믿슴다. 또한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그것의 원리―대의제와 권리, 형식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가 민주주의의 전부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겠다. 나에게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데모스(demos)의 지배를 말하며, 우리 자신을 통치하는 권력을 공평히 나눠 가?다는, 현실화될 수 없지만 동시에 필수불가결한 이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제어하는 권력을 완전히 투명하게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기에 실현 불가능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자본을 비롯한 소외된 권력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한 이상이기도 하다.
정치 이론의 역사라는 렌즈를 통해 현대의 정치 활동을 조명하면서, 나는 이론과 정치 간에 뚜렷한 선을 그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치 이론이 곧바로 정치적 행위로 번역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또한 정치 행위가 섬세한 이론적 비판과 정확히 일치하도록 요구해서도 안 된다. 기껏해야 이론은, 현실 정치가 처한 곤궁을 파헤치고 새로운 가능성을 자극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이 책의 관용 담론 비판은, 현대 자유주의와 서구 제국주의가 가진 몇 가지 특징들을 조망하도록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꼭 관용에 대한 정책이나 행동 강령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이유로, 현실 정치와 정책이 비판이론의 과제와 나아갈 방향을 일러주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현실 정치가 이론적 기획과 직접적으로 뒤섞여서는 안 된다. 정치는 필연적으로 권력과 헤게모니를 향한 투쟁이다. 반면에 이론은 기껏해야 이러한 투쟁을 비판적으로 설명해 낼 수 있을 뿐이다. 정치 이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이론을 강령적인 것으로 후퇴시킴으로써,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를 권력과 실천을 위한 긴급한 요구에서 떼어 놓음으로써, 이론과 정치가 주는 자극과 그것의 범위를 모두 제한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가 이론과 정치의 효과가 기입되는 장소가 상이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이론과 정치가 가진 각각의 힘이 이러한 탈구(disarticulation)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테고, 결과적으로 이 둘의 관계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 '저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