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신비하며, 그분은 우리가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며, 그분은 그분이 침묵하고 계실 때조차 모든 곳에 임재해 계신다. 『침묵』은 이러한 사실을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몸으로 체험해서 알게 된 한 사나이의 이야기다. (마틴 스코세이지) --- p.8
우리가 누군가와 만날 때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게 된다고 엔도는 반복해서 말한다. 더욱이 그 흔적이 ‘아픔’으로 경험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신을 보도록 해주는 창이 된다. 앞서 엔도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의 인생은 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때 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의 인생에 남겨진 흔적인 것이다. --- p.28
나의 세례를 예를 들어서 말한다면,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성복을 받은 셈이었다. 이 양복을 입어보면, 이것은 어디까지나 양복이기 때문에, 일본인인 나의 몸에는 맞지 않았다. 어떤 곳은 짧고 어떤 곳은 길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벗어버렸지만, 그렇게 되면 벌거벗을 수밖에 없었다. 달리 입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의 양복을 나에게 맞추고자 하는 노력이 나의 소설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어머니가 주신 양복을 일본인인 나의 몸에 맞는 일본옷으로 바꾸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엔도 슈사쿠) --- p.89
저는 가톨릭 신자였기에, 철이 들면서부터 신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외국 문학을 배우면서도 신의 전통이 긴 백색인들의 세계와 신이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황색인들의 세계 사이에서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분열은 프랑스에 가면서부터 점점 더 커져만 갔습니다. (엔도 슈사쿠) --- p.165
서구 기독교와 일본적 영성 사이의 ‘거리감’으로 말미암아 방황하던 젊은 날 엔도의 고뇌는, 그런 ‘거리감’의 원인을 대비시켜 객관화한 『백색인』과 『황색인』을 통해서 일단 “마침표를 찍었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은 그러나 엔도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자각의 세계가 열렸음을 의미한다. 그 자각이란, “일본인은 이미 일본인으로서, 기독교의 전통과 역사와 유산과 감각도 없는 이 일본의 풍토를 등에 지고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자각, 즉 일본인은 일본인으로서의 ‘정신과 육체라는 십자가’를 짊어지면서 기독교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체적 자각을 의미한다. --- p.176
‘중간소설’이란 평범한 일본인들의 일상에서 일본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익명의 그리스도를 그려내는 작업을 가리킨다. 성과 속을 둘러싼 엔도의 실재 이해, 즉 일상(俗) 속에 숨어 존재하면서 활동하고 있는 거룩함(聖)이라고 하는 현실 이해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 p.201
“당신이 아무리 예수라고 해도 나를 구원하지는 못할 거요. 지옥이라는 것이 있다면, 나야말로 거기에 갈 사람일 거요.”
“아니요. 당신은 그런 곳에 가지 않아요.”
“어째서요?”
“그대가 괴로워했던 것,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그것으로 충분하오.” 『위대한 바보』 --- p.219
누군가 불행한 것은 슬프다. 지상의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내가 버린 여자』 --- p.232
『내가 버린 여자』의 주인공 이름 ‘미쯔’는 ‘죄(罪)’의 일본어 발음인 ‘쯔미’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다시 말해, 버림받은 미쯔는 그녀를 버린 사람에게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거울이며, 그래서 비인간화의 낭떠러지에서 마지막으로 그들을 구원해줄 가능성인 것이다. --- p.238
배교자에 대해 엔도가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교리적인 흥미나 신앙적 영웅에 대한 흠모 때문이 아니라, 배교자에게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서구적 기독교와 일본적 영성 사이에서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던 엔도에게, 신앙을 지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벗어버리지도 못한 배교자의 고뇌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엔도 문학의 근본 모티프가 된 ‘거리감’이 객관적이고 방관자적인 공간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과 존재의 내면에서의 갈등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배교자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갈등은 기독교가 일본이라는 땅에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변형의 전주(前奏)이며 “신이 일본에게 준 십자가”라고도 하겠다. --- p.258
『침묵』 책이 출판되고 나서 일본의 독자들과 평론가들은 “이것은 신의 침묵을 묘사한 작품”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나의 의도는 “신은 침묵하고 계시지 않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침묵의 소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침묵’이었다는 말이다. 소설의 제목이 오독(誤讀)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는 말인데, 그런 것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나의 잘못이었다. (엔도 슈사쿠) --- p.281
하느님의 사랑은 그러므로 보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믿는 자는 그의 믿음으로,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그대로 구원하시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하느님인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가 선하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그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선한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은 그의 선함이라는 이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악인도 그가 악하다는 이유로 말미암아 하느님에게 버림을 받지 않는다. 악인 역시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가쿠레 기리시탄의 마리아] --- p.310
제자들이 예수의 사랑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란 현실에서는 무력하기 때문이었다. “신의 사랑이란 현실에 살고 있는 인간의 눈에는 가장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엔도는 썼다. 우리 눈에 직접적인 것은 싸늘한 현실이고, 또 신의 냉담한 침묵뿐이다. --- p.335
몇 년 전 나는 고니시 유키나가라는 무장의 전기를 썼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에 있던 다이묘 가운데 이시다 미쓰나리나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그에 대해서 쓴 자료도 적고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이 무장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외면적 행동과 내면의 마음 사이에 있었던 큰 차이, 권력자인 히데요시에 대한 면종복배(面從腹背)의 자세, 즉 이중생활자로서의 그 삶의 방식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나는 유키나가 속에서 때때로 나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해내고, 나 자신의 분신을 발견했다. (엔도 슈사쿠) --- p.356
하지만 기쿠는 성모도 사랑한 사람을 타인에게 빼앗긴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도 역시 세기치와 마찬가지로 체포당하고, 채찍을 맞고, 피를 흘리고, 십자가 위에서 죽어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자의 일생』 --- p.430
“어머니의 젖처럼 풍요롭게 강이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엔도가 본 것은 어쩌면 에게해의 태양이 내리쪼이는 그리스의 언덕에서 기독교로 착색되기 이전의 그리스 정신을 다시 발견하고서 유럽의 원천에 맞닿은 희열에 가득 찼던 유럽인들의 향수와 같은 유의 것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내용에서는 문자 그대로 동과 서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엔도가 갠지스강에서 발견한 것도 기독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의 아시아적 혈액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엔도는 자신이 시종일관 추구해오던 ‘존재의 성화’가 실현됨을 목도함과 동시에, 일본적 영성과 서구적 기독교 사이의 ‘거리’가 합일됨을 체험했다. --- p.446
“미안합니다. 그 말이 싫으시다면 다른 이름으로 바꿔도 좋아요. 토마토도 좋고 양파라도 좋고요.
“그래 당신에게 있어서 양파가 대체 뭐예요. 옛날에는 자기도 잘 모르겠다고 해놓고. 신은 존재하는가, 라고 누군가 당신에게 물었을 때 말이에요.”
“미안합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그때는 잘 몰랐어요. 하지만 지금은 나 나름대로는 알고 있습니다.”
“하면…….”
“신은 존재한다기보다 작용하고 있습니다. 양파는 사랑이 작용하는 덩어리지요. …… 양파는 어떤 장소에서 버림받은 나를 어느 순간엔가 다른 장소에서 살게 해주었습니다.” 『깊은 강』 --- p.457
『침묵』에서 엔도는 일본이라는 늪지대에 “한 발을 담금으로써” 서구적 기독교로부터의 일탈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한 발은 여전히 강 밖에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모습을 한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시아적인 그에게는 여전히 객체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엔도는 『깊은 강』에서 나머지 “다른 발도 담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마저도 그 이름을 잃어버리고 무명의 존재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이름이 없는 “양파”로서 부활한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 그리스도는 온 우주에 편만한 생명이 된 것이다. 엔도의 밖에서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들었던 서구적 그리스도는 후미에가 되어 밟힘으로써 엔도의 내면에 새겨졌고, 이제 다시 갠지스강에서 이름 없는 ‘양파’로 부활해 온 우주에 편만한 생명 그 자체가 된 것이다. ‘양파’에게는 내?외도 없고, 동?서도 없다. --- p.470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애정의 표현으로서의 유머가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고 스스로를 비우는 것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자신을 상대방보다 낮추고 비운다는 의미의 ‘케노시스(kenosis, 빌 2:7)’를 연상할 수 있다면, 다른 이와의 연대 가능성을 제기하는 유머는 신 자신이 스스로를 비워서 인간의 자리로 낮아졌다고 하는 그리스도적 존재 양태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타인과의 연대는 타인을 이해함에서 성립하고,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인보다 ‘낮은 곳에 서는 일(under-stand)’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상대방보다 낮은 위치에 자신을 두는 일의 극한은 스스로를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진 것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 엔도에게 그것은 모든 생명체로부터 버림받음으로써 역으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것들에 대한 관심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분뇨담(糞尿譚, scatology), 곧 ‘똥과 오줌에 대한 이야기’다. --- p.524
‘동반자 예수’는 인간의 현실을 무시하고 뛰어넘음으로써가 아니라, 그 현실의 피할 수 없는 존재구조 속에서 늘 버림받는 자 쪽을 담당함으로써 버림받은 자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 p.547
엔도의 작품은 일관되게 ‘어머니 되시는 분’에 의해 그 분위기가 지배된다. 거기에는 약자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배려, 비겁한 자와 겁먹은 자에 대한 부드러운 위로가 있다. (……) 뿐만 아니라 엔도에게는 버림받은 자의 아픔을 지켜보는 또 다른 눈길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의 눈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버림을 받고, 배신을 당하고, 밟히면서 우리를 살리는 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를 본다는 말은 결국 버림을 당한 자는 자신의 밟힘을 통해서 자기를 버린 자를 밝힌다고 하는 종교적인 자각으로 확대된다. 버림을 받고 밟힌 자가 버리고 밟는 자에게 신을 밝혀주는 계시가 된다는 구도가 엔도의 작품을 면면히 흐르고 있는 기본 도식이다. --- p.549
우리에게 밟히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이기적 현실을 밝혀주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에게 밟히는 익명의 무수한 존재들은 실은 우리의 끝 간 데 모르는 이기주의를 사랑의 눈으로 밝혀주어 신에게로 인도하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것이다.
--- p.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