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이 체육 수업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남학생들은 남학생끼리 또 여학생들은 여학생끼리 모둠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 서로 섞인 상태로 진행된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수업이었다면 일반적으로 남학생은 여학생보다 체격이 크고 힘이 좋으니 모둠을 따로 구성하거나, 남녀의 비율을 고르게 해서 가급적 성별 구성이 비슷하도록 조정했을 테니까요. --- p.17
만약 여자와 남자의 신체적 특성 차이가 성별 역할이나 여성다움, 남성다움을 결정하는 게 사실이라면, 일반적으로 부자의 발육 상태가 가난한 사람보다 좋으니 부자가 더 강인하다고 말할 수 있나요? 또 북유럽 사람들의 타고난 신체 골격이 동아시아 사람보다 크므로, 북유럽 사람들이 동아시아 사람보다 더 용감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아마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 p.23
중학교 1학년 사회 시간에 성역할에 대한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여성다움과 남성다움 하면 생각나는 명사나 형용사를 각자 카드에 써 보게 하였습니다. 여성다움에는 얌전한, 소극적임, 분홍색, 수다스러운, 잘 우는, 긴 머리카락, 예쁜 얼굴, 몸무게 등을 쓴 학생들이 많았고, 남성다움에는 용기 있는, 힘이 센, 적극적인, 자신감 있는, 활발한, 축구, 키 등을 쓴 학생들이 많았죠. --- p.2
프랑스의 철학자 보부아르는《제2의 성》이라는 책에서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자와 남자를 구별하는 선천적·유전적 요인이 아닌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사회적·문화적 요인에 주목한 거죠. --- p.40
1964년 영국의 패션 디자이너였던 메리 콴트(Mary Quant)는 여성 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 줄 수 있는 옷이 무엇일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남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여자들의 각선미를 드러낼 수 있는 옷으로 미니스커트를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여자 의 아름다움은 당당히 공개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 p.64
여러분 중에 누군가는 작은 키, 까무잡잡한 피부, 쌍꺼풀이 없는 작은 눈, 낮은 코, 뚱뚱한 몸매 등을 이유로 스스로를 아름답지 않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꼭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아름다운 외모의 전형일 필요가 있을까요? 아름다움이란 본래 상대적인 것인데 말이죠. --- p.76
미국에서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1968년 9월 미국 애틀랜틱시티에서 미스 아메리카 대회가 열렸을 때, 대회장 밖에서는 이 대회에 반대하는 200여 명의 여성들이 모였죠. 그들은 ‘자유의 쓰레기통(Freedom Trash Can)’이라고 이름 붙인 쓰레기통에 치마와 속옷, 가짜 속눈썹 등을 던져버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 p.82
그런데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이건만, 전철이나 길거리에서 머리가 새하얀 분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염색을 했기 때문이죠. 특히 여자 어른들의 경우에는 흰머리 그대로 다니시는 분들이 남자 어른들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 p.83
여러분은 혹시 남자는 태어나서 3번 운다는 말을 들어 보았나요? 그 3번이 언제인가 하면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나라가 망하였을 때”입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불렀음) 4학년 때 담임선생님께 들었던 기억이 나는군요. --- p.90
자신이 경험한 바를 인지하고, 느낀 바를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참모습, 즉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는 남자’에 대한 사회적 통념으로 자신의 감정을 숨기거나 부정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젠더의 틀, 즉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야 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 p.95
영화감독이나 제작자가 의도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여성이 큰 능력을 가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달하려는 것 같아서 적잖이 불편했습니다. --- p.98
만화, 동화, 영화 이외에도 성역할,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심어 주는 장치들은 TV 광고 속 여자와 남자의 모습에서도 종종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작고 예쁘게 생긴 소형차의 광고 모델은 주로 여자이고, 비포장도로에서 흙먼지를 휘날리며 거칠게 달리는 사륜구동 자동차 또는 사회지도층이나 성공한 사람들이 타는 차라며 광고하는 고급 세단의 모델은 주로 남자인 것 등이 그러하죠. --- p.104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같은 피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주변의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칫 “왜 어린 것이 되바라지게 연애를 해서 이런 문제를 일으키느냐!” 하는 비난 을 받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죠. --- p.113
초경을 시작하면 이제 성숙한 여성으로서 생식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지만, 즐거운 축하보다는 걱정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초경 이후 어른들에게 더더욱 여성다움을 강요받는다거나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기에 몸가짐을 각별히 더 조심해야 한다는 걱정과 우려의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왠지 초경을 맞은 게 기쁘기보다는 부담스럽고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 p.127
여학생들은 진로 목표를 세울 때면 누가 일부러 시키거나 강요한 것도 아닌데, 스스로 어떤 한계를 설정해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더 나은 목표를 향하고자 하는 동기 자체를 가로막고, 목표 달성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려는 의지, 즉 교육에 대한 의지마저 약화시키고 맙니다. --- p.142
우리나라의 노동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가부장적 문화는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경제 성장 과정에서 노동시장은 남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으며, 가장이라 불리는 남자가 받는 임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여자는 자녀 양육이나 가사 노동을 담당하며 경제적으로 남자에게 종속되는 가부장적 문화가 재생산되었던 것입니다. --- p.157
요즘에는 노인에 대한 적잖은 적개심을 드러내는 젊은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노인 복지를 둘러 싼 세대 간의 갈등은 날로 첨예해지는 양상입니다. --- p.171
최근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역차별’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주장이 뜨겁습니다. --- p.180
‘뷔페니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뷔페’와 ‘페미니즘’의 합성어로서 뷔페에서 음식을 골라 먹듯 일부 여성들이 페미니즘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 골라 주장하고, 불리한 부분은 회피하는 현상을 지적하는 말이죠. --- p.185
학급에서 학생들의 대화를 듣다 보면 여성을 혐오하는 표현이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엄마를 의미하는 비하 표현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말끝마다 ‘에미(어미)’라는 단어를 마치 추임새처럼 붙이며 말을 하고, 듣는 학생들은 이를 농담처럼 여기며 웃음으로 받아칩니다. --- p.189
그렇다면 왜 우리는 같은 공동체에서 살고 있는 누군가에게 강한 분노와 혐오를 퍼붓고 있는 걸까요? 많은 학자들은 최근 우리 공동체가 겪고 있는 지나친 경쟁과 불안감을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 p.197
왜 그럴까요? 여자들 사이에는 남자들과 같은 우정, 깊은 유대감이 형성되기 힘들까요? 아닙니다. 우정은 성별을 가리지 않습니다. 다만 그동안 남성 중심의 문화, 가부장적인 제도와 규범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매애를 의도적으로 감춤으로써. 자매애를 바탕으로 여자들이 연대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기 때문이죠. --- p.202
출생률 저하는 앞에서 살펴본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난 현상입니다. 단지 젊은 세대들의 삶이 방식이 변해서 나타난 현상도 아니고, 출산 장려금 같은 경제적 지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죠. --- p.210
이와 같이 가정과 학교에서 아직 뚜렷한 차별을 경험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여성이 사회적 소수자 내지는 약자라는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들리고, 때로는 반감만 불러올 수 있는 것입니다. --- p.222
한 사회에서 신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말과 글로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졌습니다. 어릴 때는 주변 어른들에게 자기 사회의 신화를 듣고, 어른이 되어서는 본인이 ‘신화 전달자’가 되어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죠. 그 과정에서 신화 속에 묘사된 남녀의 모습도 마치 하나의 신앙처럼 머릿속에 자리 잡습니다.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