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내년이면 90세네요. 기분이 어떠세요?”
“뭐 어때, 그냥 한 살 더 먹는 거지 뭐.”
“언제가 제일 좋았어요?”
“뭐 지금이 제일 좋지.”
내일도 주 여사의 하루는 비슷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TV를 보고, 노인정에 출퇴근하는 나날. 산전수전 다 겪은 주 여사는 지금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지혜로운 할머니나 철든 사람으로 살 생각은 없다고. 그저 이따금 남 흉도 보고, 웃으며 그렇게 살 거라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면서. 그것이 주 여사가 사는 법이다.
--- p.40
아이가 자라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된 건, 할머니의 노동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나는 할머니의 노동으로 자라 어른이 됐다.
--- p.43
주 여사 : 좋아하는 거는 추미(취미)로 하면 돼.
김경희 : 아까는 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야 한다면서, 막냇삼촌처럼.
주 여사 : 취소. 그냥 돈 많이 벌고 살아.
--- p.57
지나간 시간을 설명하는 게 아득하냐 물으니 아니란다. 그저 삶의 주어진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저 멀리 내다보고 살기엔 여유가 없었다고. 그저 한 치 앞 겨우 살피며 살아왔다고. 그렇게 살다 보니 아흔 살 할머니가 됐다고. 그러고는 덧붙여 말했다.
“사는 거 미리 겁먹지 마. 어떻게든 살아지게 돼. 지금 많이 웃으며 열심히 살아.”
--- p.78
김경희 : 고민이 있을 때는 혼자 해결하지 말아야 해? 나는 요즈음 혼자 많이 생각하거든.
주 여사 : 혼자 고민하면 생각만 많아져. 경험이 많고 진실한 사람한테 물어보는 게 좋아. 그게 점쟁이보다 나아. 그리고 평생 의논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들어.
--- p.87
김경희 : 그럼 할머니,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으려면 어떡해?
주 여사 : 서로 베푸는 마음, 서로 사랑하는 마음, 서로 애껴(아껴)주는 마음을 갖는 거지. 추운데 나만 목도리를 갖고 있다, 그러면 그걸 풀어서 상대방한테 “춥지? 내 목도리 둘러” 이렇게 말하면서 줘. 그렇게 애껴주는 맛이 있어야 해. 그리고 그 사람 혼자 할 일을 같이 해줘. “도와줄게” 하면서. 그 정도면 괜찮아. 그럼 사람들이랑 잘 지낼 수 있어.
--- p.114
김경희 : 그럼 인생을 즐기는 방법은 뭐야. 술을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주 여사 : 즐기진 말고, 그냥 아주 조금만, 춤출 수 있을 정도만 마셔. 아휴 아니다. 몰라. 너 알아서 해. 나 테레비 봐야 해.
--- p.132
할머니가 여든과 아흔 사이에서 아흔에 더 가까워지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서운 게 많아졌다. 이상한 꿈을 꾸거나, 노인정을 가득 채우던 신발들이 하나둘씩 줄어드는 걸 볼 때면 할머니가 훌쩍 떠나버릴까 봐 겁이 난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초연히 생각하려 하지만 영 쉽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주 여사의 부재는 준비할 수 없는 일. 초연해질 수 없는 일. 주 여사의 시간은 어째 더 빨리 흐르는 것 같고, 그만큼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 되어간다.
--- p.134
「스트레스 해소 방법」
돈이 있으면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어. 돈을 벌면 돼. 나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하고 싶은 짓 다 하고, 인심도 쓰고 살면 스트레스받을 일 없어. 돈 주면 누가 싫다 하겠어? 안 그래? 배고프고 가련한 사람한테 돈 만 원 줘봐라, 스트레스고 뭐고 다 없어지지. 그러니까 스트레스받을 땐 돈을 벌어.
--- p.145
「금전 관계」
친구한테 돈 빌려주지 마. 절대 안 돼. 친구가 야속하게 생각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거짓말해. 누가 큰돈 벌게 해주겠다 하면서 투자해라 이런 거 하지 마. 금방 벼락으로 돈 버는 것처럼 말하지? 세상에 그런 거 없어. 형제들한테도 빌려주지 마. 절대 안 돼. 동기(자매들)간도 안 돼. 돈 때문에 의 상해. 돈 있는 거 어디 가서 내색하지 말고. 만약에 엄마 아빠가 빌려달라고 하면? 부모한테는 돈 빌려줘. 대신 너네 엄마 아빠 집 담보로 잡어.
--- p.145~146
가성비 따지고 효율을 따지는 시대, 손녀딸은 쓸모없는 시간, 쓸모없는 관계, 쓸모없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산다. 하지만 어떤 건 그저 존재만으로도 쓸모의 기능을 한다. 주 여사가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처럼. 주 여사의 쓸모는 내가 언제든 전화 걸면 “어~~ 출근하고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 p.182
“나는 너한테 바라는 거 하나도 없다. 그저 방 정리나 잘하면 된다.”
책임감에 짓눌려 늘 잘해야 한다고 자신을 괴롭혔다. 직장인으로, 글쓰는 사람으로, 손녀로, 딸로, 언니로 전부 잘 해내고 싶어 조급했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방 청소만 잘해도 주 여사에게 효도가 된다, 조금 가볍게 생각하자, 고. 출근하면서 이불 정리를 했으니 오늘 할 내 몫을 충분히 해낸 거라고. 그거면 충분하다고.
--- p.188
주 여사는 “예전에는 말이야~”로, 나는 “언젠가는~”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90세 할머니와 32세 손녀는 서로 가질 수 없는 시간을 부러워하며 함께 살아간다. 할머니는 이미 겪었던 지난 시간을, 나는 언젠간 겪게 될 앞으로의 시간을.
---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