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무장투쟁노선은 무력항쟁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를 타도해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최고 단계의 독립운동노선이었다. 항일무쟁투쟁노선은 3·1운동으로 표출된 항일독립운동세력이 주도했으며 중국 만주와 러시아 원동지역의 동포사회를 근거로 했다. 항일무장투쟁노선은 또한 한말 의병세력과 애국계몽운동세력이 1910년대 해외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전개했던 교육, 문화, 종교, 언론 등을 통해 축적한 민족운동 역량과 실천적 교훈의 성과가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오랜 항일투쟁의 성과물이었다.
--- p.245
다반군대는 연해주 북부의 하바롭스크주 라좁스키 구역 한인 원호촌인 다반촌(알렉산드르 미하일로브카)에서 조직된 한인의병부대이다. 이곳을 우리말로 ‘다반’이라고 불렀던 관계로 이 군대 역시 ‘다반군대’라 불렀다. ‘청룡(靑龍)부대’라고도 불린 것은 가까운 우수리철도 정거장(베르나야역, 현재의 베리노역) 주변 이름을 중국인이나 한인들이 청룡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 p.254
1918년 8월 이후 ‘체코군 구원’이라는 명분하에 러시아혁명에 무력개입해 백위파를 지원해 러시아혁명정권을 붕괴시켰던 일본군은 1919년 말 러시아혁명세력이 득세하면서 일대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그동안 안정적인 식민지조선 통치를 추구하던 일제당국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러시아의 한인독립운동세력이 러시아혁명세력과 결합하면서 일본당국의 위기의식은 고조되었다.
--- p.283~284
1920년 말부터 1921년 전반에 이르는 시기의 러시아 원동지역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콜차크 잔당인 카벨리, 운게른 슈테른베르그, 세묘노프 등이 1920년 10월 러시아혁명세력에 의해 자바이칼주에서 축출된 후 완충국인 원동공화국이 치타를 수도로 삼고 동 으로는 우수리강을 국경으로 삼아 이만 이남의 연해주를 백위파정권과 일본군이 점령하던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원동공화국 내에 주둔한 각 의병대가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대에 정식 군대로 편성되고 통일되어 가던 시기였다. 이만남부지역에서는 빨치산운동이 한층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 p.340
자유시참변은 독립운동사상 최악의 비극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사건으로 흑하사변, 흑룡주사건, 아무르사건, 자유시사변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린다. 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흑룡주(아무르주)의 자유시에서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원동공화국 제2군단 제29연대의 지원을 받아 상해파 한인군대, 즉 사할린특립의용대를 무장해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독립군을 살상한 대사건이다.
--- p.350
1937년 강제이주와 이를 전후해 자행된 스탈린대탄압은 1860년대 이래 한인사회가 온갖 난관을 극복하며 축적해 온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성과를 송두리째 파괴한 대사건이었다. 강제이주는 고려 농촌 지역들이 전면적인 집단화(콜호즈화)를 완성하고 본격적인 집단화 단계로 접어들어 가는 시점에서 단행되었다. 강제이주 이후 시작된 광활한 중앙아시아에서의 삶은 원동지역에서의 삶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겪은 강제성과 비인간성, 그리고 정치적 엘리트들에게 가해진 정치적 탄압이라는 절망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강제이주 후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콜호즈들은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 p.369
러시아혁명 후 수청지역도 정치적 변혁의 과정을 겪었다. 10월혁명 이후 각 민족의 평등과 자유가 선포되자 수청에서 수청한인(고려인)총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철혈단 단원들이 중심이 되어 주민자치와 고려청년동지의 규합을 목표로 내세웠는데, 당시 철혈단 활동가가 275명에 달했다.
--- p.389
농업집단화(콜호즈화)는 3단계를 거쳐 진행되었다. 가장 낮은 단계는 토지를 협동적으로 경작하는 토즈(TOZ), 즉 토지의 협동경작동업조합이다. 가장 높은 단계(수준)는 (농업)꼼무나인데 이는 생산뿐만 아니라 분배까지 공동화(단합화)한 것으로 생산활동뿐만이 아니라 생활분야에서도 공동화(단합화)를 실현한 것이다. 이들 사이의 중간 단계가 아르쩰인데 농업부문에서의 아르쩰, 즉 곡물경리 아르쩰은 기초적 생산자료, 노동력, 토지 이용, 기계화 기타 기구, 노동가축, 경리건물을 공동화(단합화)하는 것이다. 공동화되지 않는 것은 텃밭(적은 채포원과 공원), 주택, 젖 짜는 가축의 일정 부분, 작은 가축, 닭 등이었다.
--- p.406~407
고려 농촌의 콜호즈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는 [선봉]의 주필 최호림이 3회에 걸쳐 기고한 「당정책을 악화하는 경향을 따리자」에 잘 나타나 있다. 최호림이 정리한 문제점은 (1) 농촌계급 분류상의 문제, (2) 경쟁적 콜호즈화, (3) 농민들의 자발적 참여 없는 콜호즈화, (4) 지나치게 조급한 꼼무나화, (5) 억제적 콜호즈, (6) 오래 유지되지 못한 콜호즈와 그로 인한 악영향 등 여섯 가지이다.
--- p.418
수청지방은 한말 이후 러시아시민전쟁(시베리아내전) 시기, 시호테 알린 산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산악지대를 배후지로 하는 “원동의 유명한 빨치산 기초초지대요, 혁명적 구역”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사회주의건설 과정이 다른 구역에 비해 매우 앞섰을 것이라고 짐작되어 왔다. 1930년 당시 수청구역 주민 수는 총 4만 1000명인데, 고려인이 2만 1000명, 러시아인이 2만 명으로 50% 이상이 고려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청지방에서 고려 사람들은 소비에트주권 앞에서 마치 “저녁에 들러 잠간 머물러 아침에 길떠나가는 손님의 몸처럼” 되어 있었다.
--- p.427
이 연구는 원동시기에 한정하면 러시아연해주지역에 대한 첫 번째 지역연구라 할 수 있다. 앞으로의 연구는 연추지역, 추풍지역, 하바롭스크지역으로 그 대상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또한 이 연구는 고려인 콜호즈(집단농장)들의 이동(이주)과정, 특히 강제이주 후의 정착 및 변모과정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기도 하다. 마지막 절에서 수청지방의 고려인 콜호즈들, 특히 수청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인마을 신영거우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한 과정과 스베들로프 콜호즈로 정착한 과정을 살펴본 것은 그러한 노력과 시도의 결산이라 할 수 있다.
--- p.453
[레닌의 긔치]의 창립자들이 강제이주 직후 정치적인 탄압의 분위기 속에서 [선봉]과의 단절을 강조한 데 비해, [고려일보]의 창설자들은 1991년 정치적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그 ‘선행지’인 [레닌기치]와 자발적으로 단절했다. 이것이 크게 대조되는 점이다. 즉, [고려일보]는 1991년 1월 1일 발행인 허진, 사장 조영환을 지도부로 해서 ‘재쏘련고려인전국신문’으로서 ‘창간’된 것인데, 그 전신이자 공산당 기관지였던 [레닌기치]와의 단절을 강조하고 명칭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소유가 아닌 ‘자유신문’임을 표방했다.
--- p.457
한인 농촌사회의 집단농장화가 확대되면서 [선봉]은 ‘콜호즈신문’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즉, [선봉]의 책임주필 이백초는 500호 기념호인 1930년 11월 7일자에 게재한 「투쟁의 50호: 사회주의적 진격의 기치를 더높이 들자!」라는 글에서, “선봉신문에 직접 참가되는 농촌통신기자의 대열을 점점 더 콜호즈 투사로서 그 비중을 높이고 있다”, “선봉신문은 꼴호즈신문으로 전환되었다”라고 선언했다.
--- p.477
[선봉]의 편집자들은 [선봉]의 기원을 창간하고 얼마 후인 1925년에는 [삼월일일]에서 찾았고, 10년 후인 1935년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앞서 간행된 [붉은긔]에서 찾았다. [선봉]의 기원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1920년대 말 1930년대 초에 진행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화’, 콜호즈화로 집약되는 한인사회의 변화 및 이에 따른 한인사회에서의 [선봉]의 역할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5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한인사회 내에서 [선봉]이 차지하는 역할과 기능은 크게 변했다.
--- p.4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