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처음으로 내 영혼이 쓴 가면 아래 맨얼굴을 본 것 같았다. 나는 스스로 생각했듯 그리 강하거나 독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모든 슬픔을 꾹꾹 참아왔을 뿐, 누구에게라도 기대어 눈물 흘리고 싶은 영혼이었다. 나에 대한 믿음 하나 있으면 종교 따위 없어도 된다던 나는 그날 밤 침대에 엎드려 어린아이처럼 울었다. 나도 힘들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 〈프롤로그〉 중에서
‘장소에는 힘이 있다’는 믿음 하나가 내게 있었다. 일본 고베의 기타노이진칸가이(北野異人館街: 1800년대에 형성된 외국인 저택 거리)에 갔을 때였다. 〈벤의 집〉이라고 불리는, 박제동물이 가득한 어느 사냥꾼의 집에서 나는 역겨울 만큼 음습한 기운을 느꼈다. 뭔가를 집요하게 모으는 습성, 그것도 생명을 죽이고 사체를 모으는 습성에는 분명 어두운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얼마나 불쾌했던지 그 집을 나와서도 꽤 오랫동안 정신이 혼미했고 기분은 푹 가라앉아버렸다.
그와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오랜 세월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바친 곳이라면 반드시 좋은 에너지가 넘쳐날 것이고, 새로운 삶을 기다리는 내 영혼에도 어떤 힘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그 힘을 받아 길고 길었던 방황을 끝낼 수 있길, 나는 간절히 바랐다. --- 1장 〈전동성당〉 중에서
그렇게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점점 부러운 마음이 가슴에 사무쳤다. 아, 이렇게 예쁜 성당이 우리 동네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봄에는 봄대로 화사하고 보드라운 꽃들이 둘러쌀 것이고, 여름엔 푸른 신록이, 가을엔 단풍이, 그리고 겨울엔 눈이……. 일년 내내 얼마나 눈이 호사스러울까. 빌딩 숲과 간판 사이에 어색하게 끼인 서울의 성당들을 떠올리자니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나바위성당을 우리집 근처에다 통째로 옮겨두고 싶은 진지한 욕심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어디에서보다 마음을 경건히 해야 할 성당을 보며 이런 탐욕을 품다니. 하지만 어쩌랴, 나바위성당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을. --- 2장 〈나바위성당〉 중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항상 괜찮은 척 미소짓는 내 표정 너머의 진심을 꿰뚫어보고 아픈 곳을 짚어내서 조용하게 위로해줄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 그나마 삶을 포기하지 않고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나를 기다리는 분이 계셨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마음이 자꾸 편안해지고 느슨하게 풀어지자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 내가 여기서 왜 이러지?’싶어 화들짝 놀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자리 아닌 곳, 남의 집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면구스러운 마음. --- 4장 〈공세리성당〉 중에서
원래의 나라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비도 오는데, 강론하는 신부님의 얼굴도 안 보이는데, 말씀이 제대로 들리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시간에 이 고생을 자처하다니. 그런데 그날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밤하늘과 야간 조명 아래 묘하게 빛나는 감곡성당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편안해졌다. 아, 밤의 감곡은 이렇구나. 이렇게 신비하고 평화롭고 은은하구나. 이걸로 충분해. 나 같은 사람들 몇몇은 아예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마을 쪽으로 시선을 던진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 5장 〈감곡성당〉 중에서
그제야 이 종교와 나 사이가 생각보다 훨씬 더 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사 시간을 죽어라 피해서 성당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성당과 나, 우린 화해는커녕 아직 서로 정식으로 인사도 나누지 못한 셈이었다. 이렇게 데면데면해서야 성당을 찾아다니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맨 처음 기대했던 것을 떠올려보았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충만한 기도와 축복을 체험하고 싶다던 바람! 미사 시간이야말로 그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었다. 아무리 신자로서의 삶을 원하지 않는다 해도 굳이 미사 시간을 피하는 건 내가 기대한 그 좋은 것들을 거부하는 셈이었다. --- 7장 〈가실성당〉 중에서
수류성당 주변을 거닐며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나는 그곳을 떠났다. 설렘에 들떠 미친 듯이 달려올 때에는 몰랐던 3시간 이상의 거리감이 올라가는 길에야 실감되었다.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길은 많이 힘들었다. 이렇게 멀었구나! 이렇게 먼 길이었구나! 마음 내킨다고 아무때나 내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구나! 김제에서 멀어지고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내가 이 성당을 앞으로 많이 그리워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슬퍼졌다. 그 전에도 다시 오고 싶은 성당이 여러 곳 있었지만, 잔칫날의 수류성당 같은 곳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자신 없었다. 아늑하고 포근한 진짜 시골 성당. 내 로망에 가장 가까웠던 성당. 아쉬움에 눈물이 나왔다. --- 8장 〈수류성당〉 중에서
주식투자로 손해를 보았고 일정한 수입도 없으니 회사를 다니던 때에 비해 경제사정은 많이 나빠진 상황이었다. 내 삶을 유지하려면 무슨 일이든 당장 시작하는 것이 옳았다. 그렇지만 그 즈음 들어온 일자리를 사흘 간 고민 끝에 사양하고 말았다. 성당 기행을 끝마치기 전이기도 했거니와 왠지 이제부터는 ‘가슴 설레게 하는’ 일로만 내 삶을 채우고 싶었다.
그 전에는 마치 백년은 더 살 사람처럼 ‘미래’에만 집착했다면 이제는 남은 삶이 한 달밖에 없는 사람처럼 ‘현재’에 충실하게 된 것이다. 책임이나 의무에 얽매이고, 남들 보기에 이상해보이지 않는 삶으로 포장하는 일을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 10장 〈용소막성당〉 중에서
그러고 보니 박완서의『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제목을 보며 도대체‘싱아’가 뭘까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이 싱아가 바로 그 싱아인 모양이다. 엄마는 계속 싱아가 눈에 띄는 대로 내게 뜯어주었고, 나는 사양치 않고 계속 씹었다. 엄마는 이렇게 싱아를 뜯어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라고 했다.
그 숲길은 원래 묵주기도를 하며 걷는 ‘로사리오의 길’이었다. 성실한 가톨릭 신자라면 묵주를 가지고 와서 묵주기도를 하며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덜렁이 신자인 엄마와 날라리 신자인 나에게 그 길은 ‘싱아를 찾아 뜯으며 걸어가는 길’이 되었다. 그런다고 뭐라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마냥 평화롭고 즐거웠다. --- 11장 〈배론성지〉 중에서
하지만 이 순간 깨달았다. 자신을 사랑하고 격려하는 일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지만, 이렇게 밖에서 주어지는 사랑은 나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을. 사람은 단단해져야 할 때도 있지만, 부드러워져야 할 때도 있다. 무슨 수련이나 고행을 하듯, 모든 짐을 홀로 지고 스스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일은 세상과 나 사이에 점점 높은 담을 쌓을 뿐이었다. 낯설고 캄캄한 길 위에서 늙고, 힘없고, 운전을 대신 해줄 수도 없는 엄마와 단 둘뿐이었지만, 더이상 무서운 것도 걱정스러운 것도 없었다. --- 13장 〈남해성당〉 중에서
정말 그랬다. 산티아고를 향해 걷고 그곳에 도착한 것으로 순례는 끝나지 않았다. 그 경험은 오히려 순례의 시작이 되었다. 칠레로, 캐나다로, 또 이곳 우리 본당으로 순명을 지키며 옮겨다니신 신부님의 삶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성당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순례를 하였다. 그때마다 내게 다가온 생생한 감동은 차갑게 얼어 있던 내 마음을 녹이고 마침내 따스하게 품어주었다. 굳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성지에 가지 않아도, 두어 시간 거리 떨어진 저 시골의 조용한 성당에서도 영혼은 새로이 타오를 수 있었다. 고작 집에서 1킬로미터 떨어진 성당에 오기 위해 산티아고부터 전국의 여러 성당을 돌아다녔나,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해지기도 한다.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