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했는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떠올려 보면 즐거운 기분이 든다. 매일 수박을 먹은 것은 분명하다. 때로는 복숭아도, 과일과 꽃을 닮은 과자를 먹기도 했다. 밤마다 모기향을 피워놓고 차가운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웃의 아이와 그 부모가 골목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것을 창문 사이로 구경하다 다시 탁자로 돌아와 무슨 이야기하던 중이었지, 하며 웃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역시 잘 기억나지 않고 기억나지 않아도 좋을 사소한 것들이지만 나중에 야, 너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나냐, 하고 떠올리면 분명 피식 웃게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여름밤이 깊어가고 풀벌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롱 베이케이션이었다.
서두르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싶다. 무엇을 보거나 어디에 가야만 한다는 의무감 없이 공기 속 투명하고 작은 입자처럼 가볍게. 무엇을 놓쳤다는 실망이나 놓칠까 하는 조바심도 없이 즐겁고 싶었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것을 문득 떠올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것은 여행의 기쁨. 여름 오후의 짧은 낮잠 같고 먼 여행을 다녀온 것 같은 서늘한 꿈같은.
여행만큼은 즐겁게 하고 싶다.
--- 「prologue」 중에서
덜컹덜컹하는 소리에 잠이 깼다. 가만히 누워 낯선 모양의 천장을 멀뚱히 바라본다. 천천히 정신이 들며 이곳이 어딘지 깨닫는 순간, 작은 안도와 기쁨이 동시에 찾아든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 미처 떠나지 않은 꿈이 떠돈다. 그것은 어디론가 떠나는 꿈, 혹은 생경한 숙소에서 잠을 깨는 꿈. 이불 속은 아늑하고 잘 마른 다다미 냄새가 희미하게 난다. 고요하게 아침이 밝아온다.
냉장고에 차갑게 식혀둔 물을 한 잔 따른다. 젖빛 유리를 끼운 장지문 너머로 연한 초록빛이 흔들린다. 문을 밀어 젖히자 말간 햇빛을 받고 반짝이는 나무 한 그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툇마루에 앉아 물을 마신다. 차가운 물이 몸속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간다. 아담한 정원에 나무가 한 그루 있는 작은 집을 교토에서 빌렸다. 한동안 ‘우리 집’이라고 부르게 될 조용히 빛나는 여름의 집. 아침 볕 속에 나뭇잎이 가만히 흔들린다.
--- 「그 여름」 중에서
아침 일찍 숲으로 갔다. 숲속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고 들었다. 숲과 책이라니, 얼마나 근사한 조합인가.
바다를 좋아한다. 무수한 빛으로 반짝이는 활기 넘치는 여름 바다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게 되는 적요한 겨울 바다도 좋다. 호수를 좋아한다. 끝도 깊이도 가늠하기 힘든 넓고 맑은 호수의 고요함이 좋다. 느리게 굽이쳐 흐르는 강도 좋아한다. 강가 주변으로 버드나무가 머리를 늘어뜨리고 산책로에 사람들과 강아지가 한가롭게 거니는 모습이 좋다. 하지만 살고 싶은 곳이라고 하면 역시 숲이 좋겠다.
숲의 분위기나 풍경을 해치지 않는 작은 둥지 같은 집을 짓고 여름에는 마당에 꽃과 채소를 가꾸고 겨울에는 집 안에 난로를 피우고 책을 읽으며 살고 싶다. 창밖으로 진녹색 침엽수 위에 하얀 눈 쌓인 깊은 숲을 바라보며. 쌓인 눈을 헤치며 찾아오는 손님이 있으면 난롯가 자리를 내어주고 불 속에 감춰둔 고구마며 귤을 함께 까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이다.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 창밖의 풍경을 아무 말없이 함께 바라보고 싶다. 사람 아닌 작은 다람쥐나 노루가 찾아온다면 더 기쁠 것 같다. 그런 꿈을 갖고 있다. 아마도 이루지 못할 꿈일 것이다.
--- 「숲속의 도서관」 중에서
별다른 계획도 없다. 단지 낯선 곳에서 평범한 시간을 보낼 뿐이다 . 이렇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하는 불안함이 슬슬 찾아오면 슬리퍼를 꿰어 신고 슬렁슬렁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수박을 사서 집으로 돌아온다. 잠깐의 산책으로도 열기에 얼굴이 달아오르고 땀이 솟았다. 찬물로 한바탕 샤워를 하고 젖은 머리를 창 쪽으로 두고 바닥에 눕는다. 서늘한 바닥이 좋아 일어날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잠이 찾아온다. 가끔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나고 살랑살랑 바람이 불어온다. 한숨 자고 일어나 그동안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수박을 쪼개 먹는다. 더위가 한결 누그러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날이 조용히 저물고 있다. 수박이 달고 시원했다.
우리 집, 그러니까 여름 한철 잠시 빌린 집을 ‘우리 집’ 이라고 자연스레 부르게 되었다. 공원과 절을 찾아가고 내가 사는 곳과 별로 다른 것 같지도 않고 전혀 다른 것 같기도 한 거리를 걷다 괜찮아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앉아 다리를 쉬고 다시 걷다가 날이 저물면 “이제 집에 가자” 하고는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의 눈치도 볼 일 없이, 옷을 갈아입거나 씻는 것도 미루고 바닥에 누워 뒹굴 거리다 기운이 좀 나며 몸을 씻고 간소한 저녁을 차려 먹었다. 툇마루에 모기향을 피워 놓고 채소절임을 안주로 맥주를 마시며 오늘 간 카페가 좋아서 다시 가보고 싶다거나 채소절임이 참 맛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다 이를 닦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불을 끄고 나면 짙은 어둠 속에 잠겼다. 어둠 속에서 맥락 없는 생각들이 떠올랐으나 대개는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깊고 두터운 잠이었다.
해가 지면 돌아가고 싶고, 그곳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푸근한 기분이 드는 곳을 우리는 집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몸을 씻고, 밥을 먹고, 몸을 뉘여 잠을 자는 곳, 별것 없는 일상이 이어지는 곳이지만 더 살아볼 기운을 내는 내 작은 안식처. 누워서 별을 볼 수 있는 창이 난 집이라면 좋겠지만 별을 보는 것도 잊고 잠드는 날이 많을 것이다. 별을 올려다볼 수 있는 삶을 꿈꾸는 건지도 모른다.
--- 「긴 낮잠 , 수박」 중에서
이렇게 손님이 없어도 되나. 이러다 망하면 어쩌나. 우리는 돌연 걱정 많은 손님이 된다. 발을 드리운 창밖으로 가만히 흔들리는 버드나무와 이따금 맑은소리를 내며 조용히 울리는 풍경, 빛이 부드럽게 고여 있는 단정한 테이블, 팬이 가지런히 걸려있는 청결한 주방, 그 안에서 묵묵히 요리를 만들어내는 신중하고 간결한 동작, 딱 좋을 정도의 다감한 응대, 식당 안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요리로 말하자면.
다양한 채소와 테린을 담은 두 가지 전채 요리와 수프, 메인인 트러플 소금을 곁들인 오리 스테이크, 직접 구운 빵과 디저트로 나온 아이스크림까지 어느 것이나 좋았지만 가장 근사했던 건 차가운 복숭아 수프였다. 복숭아 향이 감도는 산뜻한 식감의 크림수프에 트러플 오일을 살짝 두르고 얇은 햄을 가운데 올리고 푸아그라를 그릇 가장자리에 둘러 각각의 맛이 섞이지 않게 냈는데, 먹을 때 숟가락으로 살짝 섞으니 맛이 농후해져서 마치 은빛별이 총총 뜬 밤하늘에 부옇게 흐르는 은하수를 떠먹은 기분이었다.
--- 「과묵한 셰프, 푸아그라의 복숭아 수프」 중에서
오픈 시간에 맞춰 왔는데도 카페 안은 빈자리가 거의 없다. 공간이 작은 것은 아니다. 탁 트인 널찍한 홀에 천장이 높고 큰 창으로 빛이 환하게 비쳐 들어 호텔 연회장 같다. 그렇다고 위압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산뜻하게 아취가 있고 어딘지 모르게 편안한 기분이 든다. 그것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어떤 공기 때문인 것 같았다.
창가 자리에는 이 동네의 오랜 주민임이 분명한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혼자 앉아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크로와상에 버터를 바르고 창밖의 작은 마당을 내다보며 저마다의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카페의 일부분인 것처럼 자연스럽다. 단골만이 낼 수 있는 아우라가 느껴진다. 얼마나 오래된 단골일까. 젊었을 때부터 줄곧 이 카페를 찾게 되는 걸까. 궁금하다.
--- 「오래된 카페의 모닝 세트」 중에서
내 휴대폰 구글맵에는 별과 하트가 가득 찍혀있다. 지상의 곳곳에 별점을 찍고 마음을 두는 것. 그것을 이은 지도 위에 그곳이어야만 할, 혹은 그곳이 아니라도 상관없을 나만의 이야기가 쓰인다. 시간이 지난 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살며시 떠올라 가만히 빛난다.
--- 「빗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어왔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