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무이... 나 국민학교 때 말이요. 매년 첫 방아 찧으믄, 광목천 쌀 차두(자루) 네 개를 여그저그 갖다 놓으라고 했지라? 왜 그랬당가요?”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들이어서 그랬제야. 자기 땅 한 평 없이 남의 땅 붙여먹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어야.”
“우리 집도 힘든디 왜 어무이가 그 집들을 챙겼다요?”
“뭐시냐.. 교회만 가믄 이우제(이웃)를 돕고 살라고 헌디, 우리도 힘든께 그게 말처럼 안돼야. 그래서 첫 방아 찧으믄 그때 딱 나눴제. 그때를 놓치믄 일 년 내내 못하고 만께.”
“근디 왜 그걸 한밤중에 가져다 주라고 했다요? 컴컴헌디.”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자존심이 쎈 법이어야. 그거 쪼까 줌서 생색내고 주믄 쓰겄냐?”
“어무이 근디 왜 형들 안 시키고 쬐깐한 나를 시켰다요?”
“니그 성들은 머리가 굵어서 어따가 말하고 다닐까봐 그랬제야
--- p.15
1994년, 뒤늦게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4년 장학생이었다. 곱게 졸업해서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과외로 연명하며 생활비도 벌고 학생운동 하는 친구와 후배들을 뒤에서 조용히 돕고 지냈다. “다시는 광장에 서지 않으리라.” 꾹꾹 다짐하며 살았다. 그러나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운명처럼 다시 학생운동의 복판에 섰다. 전남대 총학생회장,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으로 뽑혔다. 당시 학생운동은 사회운동의 본류에서 점차 벗어나던 시기에 정권의 먹잇감이 되었다. 두 번째 구속과 퇴학! 검찰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5년을 구형, 결국 4년 1개월 투옥생활을 했다.
--- p.20
“책임은 다 니가 지고 꼿꼿하게 징역살어라. 글고 딴 사람들은 나갈 수만 있으면 다 나가라고 해라.” 나중에 알게 된 일이다. 감옥 마룻장 위에서 몇 년을 온기 없이 지내는 아들을 생각하던 어머니는 겨울이면 보일러를 꺼놓고 냉방에서 지내셨단다. 고등학생 운동으로 퇴학과 구속을 당해 24년 만에 명예졸업장을 받을 때도 그랬다. “어린 놈의 손에 수갑 채우고 밧줄로 묶어 경찰차에 태우는디 내가 환장허겄드랑께. 면회만 가믄 혀를 꽉 깨물었다잉. 어린 새끼 앞에서 눈물 안 보일라고….
--- p.25
“어르신 꿈이 뭐세요?”
“나이 들어 뭔 꿈이 있겄소. 새끼들이나 건강하고, 나야 안 아프고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이 꿈이제. ”
“그런 거 말고, 어르신 본인을 위한 진짜 꿈 없으세요?”
“팔십 평생 살았어도 나한테 꿈을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는디. 허기사 어디 꿈꾸고 사는 세월이었간디요. 살려고 살았제. 일제시대 태어나서 애기 때부터 먹고살라고 일했고, 나이 든께 얼굴도 안 보고 시집왔제라우. 새끼들 키우느라 일했고, 일마 하다가 늙어부렀제잉. 근디 뭔 꿈이 있었겄소야. 지금 사는 것이 어디 사람 사는 것이라요. 사람이란 것이 지 손으로 일해서 지가 벌어먹고 살아야 사람이제.
--- p.52
이문이 남지 않는 마을기업이지만, 이문이 남지 않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사업이 되고 있다. 농촌에서는 이문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든 의미 있는 것들이 사라지고 있는데,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이를 다시 살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역 내 42개 마을 2천여 명의 주민으로부터 파스 등 상비약품, 형광등, 식용유에 이르는 각종 생필품을 주문 받아 안방까지 배달해준다.
--- p.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