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소설
이 책은 한 마디로 ‘역사 예술 미스터리 소설’이다. 기본적인 추리소설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400년 전의 역사적 사건을 대상으로, 하나의 예술작품이 사건의 모티브가 되고 동시에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가 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중심 소재인 역사적 사건은 물론 픽션이 아니다. 단지 픽션이 아닐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전개도 철저히 저자가 실제 역사적 문헌을 발굴하고 연구한 것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의 특기 사항은 ‘역사 연구의 소설화’라 할 만하다.
거칠게 말하면, 여기 미궁에 빠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마치 철가면의 임자가 누구냐 하는 것처럼 두고두고 논란거리가 되어 온 역사상 유명한 미스터리이다. 이 소설의 저자 볼프람 플라이쉬하우어는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옛 문헌을 연구하던 중,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문서를 발굴한다. 이 발굴로 인해 400년 전 그 사건의 해답은 99퍼센트 분명해진다.
역사학회에 논문을 발표하여 이 사건에 대한 역사학계의 공식적 입장을 만들어낼 수도 있었지만, 저자는 이것을 소재로 한 편의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저자가 단순히 소설가라서가 아니라(저자 플라이쉬하우어는 소설도 여러 편 썼지만, 기본적으로 문학을 연구하는 문학연구가이다), 역사라는 과학은 문헌이 밝히고 있지 않은 ‘1퍼센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저자는 99퍼센트의 엄밀한 고증을 1퍼센트의 상상으로 채색하여 《퍼플라인》이라는 지적 추리소설을 탄생시켰다. 이 소설이 탄생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저자는 <부록>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역사’와 ‘이야기’ 사이에서 고민하는 작가의 절절함이 이 소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그 어떤 획기적인 역사상의 출처도, 한 인간의 마음속과 그 숨은 동기를 들여다보게 해주지는 못한다. 어떤 것도 최종적인 진실을 제공할 수는 없다. 다만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던 혹은 잃어버렸던 퍼즐의 조각들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직관을 따랐고, 역사학자가 보통의 경우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해냈다. 환상을 믿고 소위 사실들은 의심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또한 내가 자주 받았던 질문, 즉 이 주제에 관해 왜 논문을 써서 발표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질문은 항상 나를 당황케 했고 가끔은 조금 슬프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 질문 속에는, 그토록 흥미롭고 경이로운 역사적 발견을 소설을 쓰느라 ‘낭비해 버린’ 것이 매우 유감스럽다는 비판의 소리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똑같은 생각을 한다. 나야말로 문화사적 논문을 쓴 것이라고! 단지 소설의 형식을 빌렸을 뿐이라고. 소설을 통한 그림의 해석.
그렇다, 나는 절대로 환상幻像에다 박사학위의 모자를 씌우고 싶지는 않다. 그 모자의 차양이 탁 트인 지평선을 가릴 것이다. 그런 주제를 가지고 주석과 전기적 사실들을 담아 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해 몇 안 되는 교수들과 학생들에게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정말로 커다란 손실이 아니겠는가.
소설의 다층적 구조
이 소설은 다층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간략한 소개를 위해 각 층위를 하나씩 분해해 보자.
수평적 구조: 역사-예술-추리
① 역사: 1599년, 당시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정부였던 가브리엘 데스트레가 임신 중에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녀의 죽음은 앙리 4세와의 결혼을 일주일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크나큰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16세기 프랑스는 신?구교 간의 대립으로 엄청난 내란을 겪고 있었다. 수차례에 걸친 위그노 전쟁은 전 국토를 황폐화시켰고, 가톨릭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침략한 스페인 군대에게 무기력하게 짓밟혀야 했다.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왕위에 오른 앙리 4세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스페인을 물리치고 프랑스에 평화를 정착시켰다. 하지만 그에게는 여자를 너무 밝힌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인이 바로 가브리엘 데스트레였다. 그녀에게 반한 왕은 왕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이혼하고 가브리엘과 결혼하려 하지만, 프랑스 왕비 자리는 신?구교가 각축을 벌이던 당시 유럽 지형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태풍의 핵과도 같은 자리였기에, 왕의 이 계획은 국내외적으로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왕은 무리하게 결혼을 선포하고, 결혼 예정일 일주일 전 가브리엘은 의문사한다.
② 예술: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 작가를 알 수 없는 루브르의 이 그림 한 점은 그 진기한 모습으로 보는 사람마다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두 여인이 나체로 욕조 속에 들어가 있고, 왼쪽 여인이 오른쪽 여인의 젖꼭지를 쥐고 있으며, 왼쪽 여인은 마치 뜨거운 것이라도 잡는 양 왼손가락으로 아슬아슬하게 반지를 잡고 있다. 두 여인의 뒤에는 자줏빛 커튼이 드리워져 있으며, 열려진 커튼 자락 사이로 바느질하는 여인과 꺼져가는 벽난로, 그리고 녹색 천이 덮인 탁자가 보인다. 벽난로 위 액자에는 앉아 있는 남자의 벌거벗은 하반신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남자의 허리께에는 붉은 천이 던져져 있다.
두 여인의 하 수상한 자태와 그 배경의 음울함은 도대체 누가 왜 이 그림을 그렸는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여인 중 젖꼭지를 잡히고 있는 오른쪽 여인은 가브리엘 데스트레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녀를 모델로 한 이런 그림으로 도대체 화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것이 바로 플라이쉬하우어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이며, 동시에 이 소설이 전개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희한하게도, 이 그림은 여러 점의 유사품을 가지고 있다. 그린 스타일로 보아 같은 작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샹티이 판 <욕조 속의 가브리엘>과 피렌체 판 <욕조 속의 여인들> 두 점이 작가에 의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으며, 그 밖에 다른 ‘목욕 시리즈’들도 이 소설의 미스터리를 더욱 짙게 하는 데 한몫 하고 있다.
③ 추리: 위의 역사와 예술을 연결하는 것이 추리이다. 즉, ‘가브리엘 데스트레는 왜 죽었으며(누가 그녀를 죽였으며), 미지의 화가는 그녀를 모델로 왜 저런 진기한 그림을 그렸을까?’ 이 둘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게 이 소설의 큰 줄기이자, 저자가 10년을 매달렸던 주제이기도 하다.
이 추리를 위해 저자는 ‘비냑’이라는 가상의 화가를 창조한다. 그리고 소설의 첫머리에 가브리엘의 죽음과 의문의 화재사건을 병치시키고, 가브리엘의 이야기와 한 무명화가의 이야기를 나란히 풀어나간다. 이 두 이야기가 접목되는 부분에서 독자들은 그림에 대한 의문을 풀게 되며, 가브리엘의 죽음에 관한 비밀이 그림 속에 숨어 있음을 알게 된다. 사건이 풀리는 이 대목은 일종의 반전이며 대단원의 막이 내리는 결말이지만, 사인(死因)에 대한 어떤 직접적인 암시를 그림 속에 암호화했다는 식의 통속적인 결말을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 책은 어디까지나 실제 역사를 연구한 연구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미스터리와 유물로 남은 그림 한 점과의 관계는 엄밀한 고증을 거친 역사가의 시각에서, 그리고 역사를 바라보는 한 문학가의 심층적인 인간 이해에 기초해서 상상된 것이다. 따라서 그 결말은 작위적인 결말이라면 절대 가져다줄 수 없는,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예술에 대한 애정 어린 이해를 가져다준다.
수직적 구조: 16세기-19세기-현재 (액자소설의 형식)
① 16세기: 16세기 말 앙리 4세 치하를 배경으로,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의문의 죽음과 그를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이해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더불어 그 시대의 의술과 수술 장면, 장인(예술가)의 생활, 궁중 연회 등이 철저한 고증을 통해 생생하게 묘사되어, 읽는 이에게 당시 문화를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부가적인 즐거움도 준다.
② 19세기: 16세기의 사건과 현재를 매개해 주는 것이, 19세기의 역사가 모르슈타트가 미완성으로 남겨놓은 원고이다. 화자는 백 년 전의 이 원고를 우연찮게 손에 넣은 후, 가브리엘 데스트레의 죽음에 관심을 갖고 추적한다. 이 소설의 제2부가 바로 모르슈타트의 원고 내용이다.
③ 현재: 문학연구가 ‘나’는 <가브리엘 데스트레와 그 자매>라는 진기한 그림에 빠져 있던 중, 친구 코친스키에게서 19세기 역사가 모르슈타트의 원고를 건네받고 400년 전 역사를 탐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