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용할 수 없는 우수가 나를 휘감았다. 지금까지 하늘을 나는 잠자리와 작은 꽃들, 강과 바다, 풀과 하늘, 육지와 푸른 수평선 따위에 대해 재잘대던 릴랴가 불과 한 시간 만에 성숙한 여인으로 변해 버렸다.
--- p.20
레라는 포옹을 풀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다소 상기된 그녀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서렸고, 어쩐지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난 더 맘에 들었다. 나는 오늘 밤이 우리에게 마지막 밤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린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다.
--- p.64
나는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의 움직임을 아이처럼 관찰한다. 나는 태양이라고 하는 나비를 잡는 사냥꾼이다. 나는 그것들을 뜰채나 그 어떤 장비도 없이 사냥한다. 손만 내밀면 무지갯빛 태양 광선을 띤 나비가 내 손바닥에 내려앉는다. 그 나비는 사시사철 내 손에 날아와 앉아서는, 은빛 날개로 내 손가락들을 간질이다 날아가 버리고는 한다.
--- p.126
아, 봄이여, 어서 오라! 사람들이든, 물고기들이든, 도시의 돌들이든, 모두 네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봄이여, 따스함을 그리워하는 수백만의 고동이 느껴지지 않는가?
--- p.181~182
“어디에서 읽었는데, 사람은 저마다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대. 자신의 진짜 모습은 맘속에 비밀스레 감추고 있고, 대신 다른 모습을 ‘나’라는 이름으로 내보이는 거래. 그렇게 해서 주변 현실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대. 나도 일종의 보호막으로 예르나라는 이름을 생각해냈지. 다른 사람들한테 나는 예르나지만, 당신한테는 그러지 못하겠어.”
--- p.227~228
그녀가 잠에서 깼다. 나는 얼른 고개를 떨구고 자는 척을 했다. 그녀는 일어나서 이불을 끌어당겨 나를 덮어주고는 부엌 쪽으로 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여자가 옷을 입고 있을 때와 벗고 있을 때 걸음걸이가 저렇게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벗고 있는 그녀는 옷을 입고 있을 때와 전혀 달랐는데, 마치 어린아이의 걸음걸이와도 같았다. 무방비 상태로 발가벗고 있는 아이가 차디찬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그를 맞이해주는 문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얀 들판이 보인다. 끝도 없이 드넓은 들판이다.
--- p.233